사도행전 15장을 읽으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율법의 문제에 대한 제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고 (마 5:17),
바울도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했습니다 (롬 3: 31).
그런데 베드로에게 율법이 금한 음식을 먹으라 하시고 (행 10: 13-16)
우리 믿음의 시조인 아브라함에게 "너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 (창 17:10) 이라고 하셨던 할례를
갑자기 해도 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이 저는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특히 모세오경을 사랑합니다. 옳고 그름, 거룩과 비거룩을 확실히 구분하시고
죄에 대한 처벌도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명확히 하시고
또 그 율법이 있기에 긍휼과 은혜, 십자가 또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위치가 다시 혼란스러워졌었습니다.
더구나 그 문제 때문에 저는 지금 남편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내가 이 율법을 맡은 유대인이고 너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라고 하면서,
너가 나같이 되지 않는한 우리가 도저히 진정으로 하나될 수 없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7년 결혼생활 중 더 당혹스러웠던 것은,
성경을 사랑하는 제가 음란, 게으름, 약속 불이행 등의 죄를 짓고 있고
하나님 없는 남편은 그런 저를 품어주고 기다려주고 사랑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이 안 되어서 우리들교회로 왔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신앙의 방법론은 내가 우월한 것 같은데 왜 삶의 결과는 내가 부족할까.
이런 내 죄를 알면서도 남편을 판단하면서 남편을 아프게 하는 내 자신이 감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큐티인의 방식으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해보니 또 답이 나왔습니다. 제 개인적인 응답을 보다 객관화하고 싶어서 여기에 나눕니다.
"율법이 어떻게 영원한 규례이면서 동시에 깨트려 질 수 있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율법은 구원의 조건, 그 진입장벽은 아니다.
"그래도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맞지요?"
--> 신자는 율법의 최고 강령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해야 한다. 모든 율법이 그 두 강령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그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
내가 이미 너를 대신해서 그 율법을 다 지켰다. 너가 그 율법을 다 지키도록 내가 이룰 것이다.
너는 그런 나의 능력, 사랑을 믿기만 하면 된다. 내가 율법을 너희 가운데 이룬다니깐!
그래 내가 그렇게 만들테니깐 그냥 믿고 따라와.
이해가 되었습니다.
내가 정말 깨끗하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결론이었습니다.
나의 역할은 율법에 비추어 내 안에 얼마나 사랑이 없음을 회개하고 그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가실 것을 믿고 구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결론이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승리의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지금 인내하는 것을 정말 기쁘게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지금 나와 이혼을 얘기하는 차가운 남편이 구원 받을 것이 확실하다면, 지금의 이 냉전을 인내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어제 목장 모임에서 본 자매들도 그렇게 힘든 일 가운데 두시면서 구원을 확실히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제가 쓰고 있는 논문도 그런 깨끗한 사랑의 열매가 될 것이라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
이 나라의 구원, 북한의 구원, 한국의 영어교육의 문제의 해결, 한국의 영어교육 학계와 세계적인 응용언어학과 사회언어학의 복음화도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만큼도 너무 놀라워서 더 이상 지경을 못 넓히겠다고 했습니다.
어제 목자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 없는 이방인들의 수고로 유대인이 회복된다, 그리고 나서는 그 회복된 유대인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유대인이라고 자처하는 저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없는 제 남편, 제 시댁 식구들, 제 지도교수님들이 그동안 수고해왔습니다.아이 안 낳고 느리게 쓰는 논문을 6년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어서 진정한 구원을 이루어서 이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통로가 되기를 믿고 구합니다.
저의 적용은, 그래서 지금 이 시간들 (내 부족함, 불임의 수치, 거절감, 비젼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래참는" (고전 13) 사랑을 거의 처음 해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