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심령
작성자명 [김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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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8.04.30
니체의 경고가 생각난다.
용과 싸우다 스스로 용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우리 크리스천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언제나 진리에 대해, 경건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자칫 우리마저도 투사가 될 수있다.
분기탱천하기 쉽고 자칫하면 용이 될 수도 있다.
필립 얀시는 은혜의 렌즈 를 끼라고 했다.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 죄많은 사람, 사람들..
그들을 볼때 우린 은혜의 렌즈를 끼고 보아야한다고 했다.
불완전이야말로 은혜를 받기위한 선결조건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은혜의 빛은 불완전의 틈,상처의 갈라진 틈으로 새어든다고 말한다.
그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그가 한 말이다.
묘하게도 하나님은 성인보다 죄인을 찾으신다.
교회는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는 사람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다윗의 아둘람 굴처럼, 그렇고 그런 사람들, 흠많고 모순많고 한많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모여들 수있는 곳이어야 한다.
오늘 시편 51편 10-19절에서 상한 심령을 묵상한다.
하나님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상처받은 치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치유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꼭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상처, 그 갈라진 틈으로 은혜의 빛이 새어들어가기 때문이다.
상처도 없고 은혜도 받았으면 좋겠지만 사람은 그러지가 못하다.
상처가 없고 아픔이 없으면 은혜를 알지 못한다.
은혜를 사모하지도 갈구하지도 않는다.
상한 심령의 답답함이 없기 때문이다.
등따시고 배부르면 은혜보다는 딴 생각만 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패키지라고 했다.
고통은 고통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안고 오는, 은혜와 함께 오는 패키지라 했다.
고통의 상한 심령이 있을 때엔 그곳에 반드시 은혜 또한 준비되고 있는 것임을 알라고 했다.
마태복음 5장 말씀이 생각난다.
애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 그에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
4절의 말씀이다.
죄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라,
무덤덤한 사람이 아니라,
죄에 대해 민감하고 마음아파 하는 사람,
자신의 실수, 죄에 대해 통애하고 자복하는 사람,
그런 상한 심령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겉치레만 멀쩡한 제사보다는 상한 심령의 통곡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오늘도 또 나아간다.
죄를 짓고, 실수하고 넘어지면서도 또 뻔뻔하게 아버지를 부른다.
그분의 이름앞에 머리를 숙인다.
상한 심령의 통애를 멸시치 않으시는 하나님,
그분 앞에 내 죄를 자복하면서 또 아버지를 불러보는 수요일의 해맑은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