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퍅했기에 더 크게 받은 은혜
작성자명 [박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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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8.04.11
2008-04-11(금) 출애굽기 10:1-20 ‘강퍅했기에 더 크게 받은 은혜’
어제, 지구에서 불과 400여 킬로미터, 서울 부산 간의 거리도 안 되는
우주의 공간에서 벌어진, 우주선과 우주 정거장의 도킹 장면을 지켜보며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은 그 광경을 어떻게 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조물들이 하는 일들을 보실 때에 하나님은 한 가지만 보실 겁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인간은 다들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망하는 길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점검,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점검일 겁니다.
바로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나에게 꼭 필요한 것도 그것인데
그 일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됨에
강퍅한 왕에게, 직언을 넘어 고언(苦言)을 하는 신하들의 행동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로에게 임한 마지막 은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 사람들을 보내줍시다’의 바른 말은
신하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의 고언은
목숨을 내 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사업을 시작하여 망하기 전까지, 20여 년의 세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내 소견대로 행할 때, 옆에서 내 상태와 사업의 현주소를
객관적으로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많은 영세 기업들이 그렇듯이, 법인의 형태를 갖추고도
업무에 대한 중간 평가와 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안 해도 될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업이 위기에 몰려 존폐의 기로에 섰을 때, 누군가 내 옆에서
‘아직도 망한 줄을 알지 못하느냐’의 고언을 해주었더라면
훨씬 빨리 살 길을 찾았을 텐데, 그런 일을 해준 사람이 없었던 것은
내가 바로보다도 강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로보다 강퍅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의 점잖은 경고보다
‘아직도 망한 줄을 알지 못하느냐’의 고언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망한 줄을 모르다가
나중에는 망한 걸 인정하기가 싫어졌고
점점 일어설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남을 괴롭게 하고, 세상 법을 어기며 지은 죄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죄 많은 곳에 은혜 많다고,
말해주어도 사람의 말은 듣지 않을 것을 아시기에
교만의 바벨탑을 흩으신 후에 성령이 직접 개입하시어
강제로 끌고 가시는 지금의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이제야 깨달아집니다.
지금의 삶이야말로
강퍅했기에 더 크게 받은 은혜라 생각하니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씀이 또 깨달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