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7일 목요일
누가복음 16:1-13
“사랑의 또 다른 이름 거룩한 낭비 (3)”
바리새인들의 편에서 보면 세리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오늘 본문은 탕자의 이야기 연장선상에서 보아야만 한다. 허랑방탕한 아들을 맞는 아버지의 마음을 맏아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다. 그의 말대로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살림을 말아먹은 아들을 받아드리는 것은 공의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아들을 품에 안아 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었다. 용서란 사랑의 꽃이다. 모든 허물을 덮는 용기이다.
오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네가 내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지금은 네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훗날에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를 진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럼에도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 이 지구상에 구원해야할 사람이 너 하나만이라도 나는 이 땅에 와야만 했단다. 그것이 사랑이니까? 사랑은 숫자가 아니니까.
너희들이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이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불을 켜고 쓸며 찾아내기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세례요한의 말을 빌리자면 흔해빠진 돌들을 명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쳐버리면 될 법한 인생들에게 이처럼 목을 매고 계신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누가복음 9:51
지금 주님께서 가시고 있는 길이 바로 나를 향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
나 같은 자를 위해 하나님 당신의 생명을 거신다. 나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걸어가신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 ‘거룩한 낭비’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의 행동을 돌이켰다. 내일이라는 시간을 보게 된다.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바로 회개이다. 다시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대신할 모든 것을 부인하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경험, 내가 가진 지식 그리고 나의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내가 져야할 십자가가 보인다. 돌이키는 현장에 주님이 계신다.
ds
◆ 민둥산 중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