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6일 수요일
누가복음 15:11-32
“사랑하면 보인다”
나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나라였다. 나의 세계에 갇혀 예수님을 사생아라고까지 말하였던 자였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를 넘어서지 못한 집나간 아들이었다.
작업 중 드릴이 튀어 오른 쪽 눈을 실명할 때까지 이 땅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던 자였다. 눈을 다치고 누님이 출석하고 있는 삼양제일교회 홍재구 목사님의 소개로 인천 조석주 안과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보름 입원하고 있을 때였다. 나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신다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궁금하였다. 과연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사실일까? 퇴원 후, 새벽에 교회라는 데를 처음 나갔다. 나무마루 바닥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는 목사님이 내 이름을 호명할 때까지 기다렸다. 드디어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목사님의 기도소리가 내 마음을 울렸다. 무엇인지 모를 감동이 몰려왔다. 다음 주 무엇에 이끌린 듯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목사님께 감사의 보답으로 교회를 나가드린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 목사님께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하려는데 눈을 다쳤을 때, 나를 위해 기도하는 목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눈만을 위해서 기도하시지 않았다. 집 나간 아들처럼 방황하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나는 집나간 자식이었다.
모든 것을 낭비하고 살아가던 자였다. 주님께서는 기도소리와 함께 나를 향하여 달려오셨다. 삼십육 년 전 이야기가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홍재구 목사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도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부를 시작하신다. 집에 남아 있던 그래서 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맏아들의 이야기였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풍악이 울리는 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허랑방탕했던 동생이 돌아왔다고 큰 잔치가 열린 것이다. 그는 노하였다.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나와서 들어올 것을 종용하였다. 그때 봇물처럼 가슴에 맺힌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누가복음 15:29-32
자신이 가지고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 감사 또한 잊게 된다. 그는 아버지 것이 자기 것임을 깜박 잊어버렸다. 상대적 빈곤감에 노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사랑 안에 살면서도 기쁨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분노가 넘치고 있었다.
오늘의 말씀은 떡 잔치에 초대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그곳에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왔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당시 종교지도자였고 상류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세리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였다. 오늘 말씀 속에서 비쳐진 둘째 아들이었다. 그들은 맏아들로서 당연히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의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하고 싶으셨다. 바로 집안에 있는 탕자였다.
나는 어느새 집에 남아 있던 큰 아들이 되어 있었다. 돌아온 동생을 반가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감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과는 달리 불평하고 있었다. 오늘 내가 누리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만난 감격과 기쁨의 시간이 사그라졌다. 첫사랑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나는 오늘 어떤 아들이 될 것인가?
아버지는 변한 것이 없으신데 아들들이 변해버렸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변해버린 아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기다렸기에 보였다. 얼굴을 보고 안 것이 아니다. 그가 걸어오고 있는 걸음걸이를 보고 알아본 것이다.
사랑하면 보인다.
오늘도 누추한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는 나를 보고 달려오신다. 기다림, 이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 양수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