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8일 화요일
누가복음 13:22-30
“아직은 좁은 문이 열려있다.”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실 때였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누가복음 9:31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골고다였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실 수 없는 사역이 있으셨다. 바로 각 성과 각 마을로 다니시며 가르치시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목에서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였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 사람은 숫자에 관심이 있었다. 예수를 추종하는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 라는 당연한 궁금증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신다.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대신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너는 숫자에 대한 관심을 끄라. 그리고 본질에 대해 집중하라는 촉구이다. 좁은 문이라서 찾는 이가 적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아직은 문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 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한 번 닫으면 그 후에는 열리지 않는 문이다. 구원은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 시급성에 대해서 가르치신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누가복음 13:26-27
이것은 교회를 다니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느냐는 관계의 문제이다.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 허리 구부러진 여인을 고치셨다. 그리고 이 가련한 여인을 향해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선언하신다. 오히려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책망하던 회당장에게서 행악하는 모든 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좁은 문을 향하여 나아오는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좁은 문을 말씀하시면서 또 다른 의미의 넓은 문을 선언하고 계신다. 이스라엘인들은 구원의 영순위가 자신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들의 예측을 완전히 뒤집어엎으신다. 이것은 혁명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반전이었다. 동서남북으로부터 오는 자들 가운데 나의 이름이 있다. 구부러진 인생이었던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하셨다.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쳐 주신 것이다.
겨자씨의 꿈을 이야기 하셨다. 누룩의 변화를 가르치셨다. 보잘 것 없는 자에게 꿈을 꾸게 하셨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버려진 자였다. 겨자씨 같은 여인에게 예수님의 손이 닿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누룩의 변화가 일어났다. 좁은 문이 바로 예수이시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율법으로 구원 받으려는 회당장과 같은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민둥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