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1일 토요일
c“하나님 나라 공동체”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것을 무지라고 한다면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을 존 러스킨의 말을 빌리자면 비겁이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교사는 자신의 직업에 걸맞게 말씀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를 시험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구도자였다. 그의 질문에 주님께서 역으로 질문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기록된 말씀을 너는 어떻게 이해하느냐’라며 해석까지 요구하신다. 그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신명기 말씀을 인용한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명쾌한 해석이었다.
그의 이 같은 대답에 주님께서는 정답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는 커다란 間隙(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극이 있다.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셨다는 21절 말씀이 바로 이 율법사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의 관점은 무엇을 하여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길을 알고 있었지만 그 길을 갈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이 간극을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10:22-23절
그렇다 오늘 내가 믿는 예수님은 내가 노력하여 얻는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선택 받은 자이다. 많은 선지자들이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듣고자 했으나 듣지 못한 이 계시를 받은 자이다. 이 영광스러움에 참예하는 기쁨이 있는가?
일차적으로 예수를 시험하였던 율법사는 칭찬에 고무된 듯, 옳게 보이려고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내 이웃은 누구이니까?”
주님께서 그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이 똑같이 ‘그를 보고’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존경의 대상이었던 제사장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갔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있었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부탁하였다. 돌보아 주되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는 보증까지 하였다. 그는 응급실까지 동행한 것이 아니었다. 응급처치를 하였고 응급실까지 동행하였고 병원비를 지불하였을 뿐만 아니라 입원비까지도 계산 하였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돌봄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사역이었다. 이 사마리아인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책임지시기 위해 나의 마음에 살고 계신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선한 이웃되신 주님을 찬양하며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