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시오.
지금까지 우리가 다룬 사람의 영을 개발하는 방법 두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4)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1:24#12316;25)
성경은 예수님에 관해서 말하면서 예수님은 “더 좋은 언역의 보증”이라고 했습니다.(히7:22)
새 언약(신약)은 더 좋은 언약입니다.
예수님은 이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십니다.
이 말은 마태복음에서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예수님께서 이 말씀 뒤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1장 1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다른 번역본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말이 이도어지도록 지켜보겠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 주의 말씀대로 되도록 주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지켜볼 것도 없고 이루어지도록 서두를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은 우리의 거듭난 영(spirit nature)을 강하게 세우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의 개발은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습니다.
이 네 가지 공식 중에서 세 번째는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앞 장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면 말씀을 실천할 수고 없고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그 의미를 알고 그 말씀대로 행동할 때까지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대면하든지 제일 먼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정도로 우리는 말씀을 의식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별로 없습니다.
위급한 일들이 터지면 자신들의 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푹 젖도록 해 놓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영에 붙잡아 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적인 관점에서 반응을 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이 마음에 떠오르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고 있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하려고 서두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내적 본성의 일부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두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떤 위급한 일을 만나든지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은 뭐라고 하셨는지가 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적 본성이 된 말씀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서 우리 마음을 조명하고 우리 영에게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그리그도인들은 흔히 어떤 주제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하신 것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얻으려고 합니다.
목사님들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조언을 당신에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조언은 매우 빈약한 것입니다.
때때로 좋은 의도로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조심스럽게 조율되지 않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조언을 따르다가는 정말 큰 어려움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나도 한 번 그렇게 했다가 거의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수년 동안 목사로서 여러 교회를 섬긴 뒤에 나는 주님께서 순회 사역으로 나를 부르신 것을 느꼈습니다.
순회 사역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지 제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계속 목사로서 교회를 섬기기를 바랐습니다.
목사로서 한 교회를 섬기는 것은 어느 정도의 안정과 같은 순회 사역이 제공할 수 없는 보상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이 어렸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가족과 함께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내 영에 말씀하시는 것을 느끼고 마침내 순종하여 복음 전도 사역으로 순회 사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시키는 일을 하러 나갈 때는 모든 일이 항상 매끄럽게 잘 되리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일이 잘되거나 안 되는 것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지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환경만이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게 되고 그렇다면 바울은 한 번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던 적이 없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놓친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가 이 세상의 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살려고 결단을 하면 마귀가 우리와 대항하게 될 것입니다.
매달 마귀가 방해하는 집회를 계속하면서 심각한 제정적인 싸움을 하면서 순회 복음 잔도자로서 일곱 달 동안 일을 하고 난 후에 나는 돌아가서 목사로서 교회를 섬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내가 결정”하였지 “주님이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의 하십시오.)
동부 텍사스에 있는 상당히 큰 잘 되는 교회에서 그들의 목사가 되어 줄 것을 고려하면서 그들을 위해 설교를 해달라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들은 매월 담임 목사에게 750달러에서 1100달러 정도의 사례비를 드렸습니다.
1949년도니까 그 당시 돈의 가치가 지금보다 훨씬 컸을 때입니다.
그 교회는 사택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자연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 제안은 매력적이었습니다.
나는 이전에 그 교회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성도들을 좋아했고 그들도 나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가운데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고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믿었습니다.
기적이 보통으로 일어나는 교회였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이 교회로 인도하신다면 이 교회를 담임목사로서 섬기는 것보다 내가 더 좋아 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그들의 초정을 받아들여야겠다고 또 적어도 그들을 위해 설교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한 주일을 비워서 나는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이웃에 있는 한 교회로 갔습니다.
우리는 주일학교 시간에 맞추어 그 교회에 도착하였습니다.
나는 성경 공부하는 교실의 맨 앞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그 때 가르치는 내용이 얼마나 나에게 꼭 맞는지 나는 놀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