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3일 토요일
야고보서 2:1-13
“진정한 경건이란?”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고아와 과부 그리고 부자를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달리 보는 것부터 출발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유물상통을 경험한 초대교회에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뿌리 깊은 본성에 내재된 차별의 속성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 가운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집을 떠나 흩어진 공동체 안에도 차별이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아야한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 경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의 이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바로 천국이 되게 하는 일이 성도가 걸어가야 할 길인 것이다.
사랑의 기준은 말씀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분명한 표식임을 기억하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차별하거나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흩어진 열 두 지파를 문안하면서 그들을 향해 부르기를 내 형제들이라 부른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라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야한다고 힘주어 말씀하고 계신 야고보의 권면에 귀 기울여야 한다.
부자와 과부와 고아를 내 이웃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부자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땀과 노력을 보지 않은 채, 그들을 경원시 했다는 점이다. 나 역시 물질을 사랑하면서 많이 가진 자들을 사시로 보는 이중적인 내 모습을 돌아본다.
긍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심판하기에 눈에 혈안이 되어있는 세상을 이길 수 있음을 기억하자.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온통 슬픔과 분노에 차 있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긍휼의 마음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동일한 조건을 요구하셨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다. 여기에 ‘누구든지’라는 단어에 주목해본다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사람을 똑같은 성도로 볼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균형 잡힌 경건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