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6일 토요일
창세기 49:1-27
“야곱의 유언”
이런 이별은 참으로 좋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반드시 뒤따른다. 그것이 인위적인 것이든 아니면 죽음이라는 타의에 의한 것이든 꼭 찾아오는 이별이라도 이런 이별은 참으로 좋다.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자식들의 앞날에 대해서 예언자적 유언을 남기고 있다.
창세기 49: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거짓으로 시작한 야곱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브니엘의 하나님에게서 받은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자녀들을 축복하고 있다.
장자 르우벤의 이름을 부른다. 르우벤아 네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음이로다. 유언의 시작이 죄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한 마디는 철퇴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라헬이 가나안 땅을 앞두고 산고로 베냐민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후에 생뚱맞게 르우벤과 빌하가 동침한 일을 삽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일을 이스라엘이 들었다고만 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창세기 35장 22절에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그러나 오늘 유언을 시작하면서 첫 마디가 죄를 묻고 있다는 사실이다. 난 이 말씀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무릎을 꿇는다.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내 마음에 수없이 외웠던 말씀이 있다. 우리의 죄과를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기셨으며, 우리의 죄를 도말하셨다.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같이 될 것이요 등,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만을 노래하고 있었다.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애써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죄도 이와 같을 것이다. 죄는 용서받지만 죄의 댓가는 치러야 만 한다는 사실이다. 용서받은 이름 르우벤은 40여 년 전의 죄의 결과로 장자권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시선에 용기를 얻는다. 그도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였다. 그가 르우벤과 다른 점은 회개하였다는 점이다. 며느리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다말을 불사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의 임신이 자신의 씨로 말미암은 것을 알게 되자 ‘그가 나보다 옳도다.’라고 곧바로 시인한다. 돌이킴의 축복을 유다를 통해 배운다. 그의 족보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소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세기 49:10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최종적으로 자신이 묻혀야할 곳,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할 막벨라 굴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가 묻힌 곳, 자신의 아버지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야곱의 아내 레아가 묻힌 곳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끝까지 바라보았던 곳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다. 요셉을 통해 모든 것이 풍족하고 여유가 있는 애굽은 잠시 머물 세상이었다. 그는 애굽에서도 나그네였다. 그러한 야곱이기에 죽음 너머에 있는 약속을 붙잡을 수 있었다. 유언을 마쳤다. 발을 모으고 숨을 거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