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2일 화요일
창세기 46:28-47:12
“험악한 세월 130년”
야곱의 일생을 정리해보면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에서와 야곱의 갈등으로 시작된다. 두 번째는 라반과의 만남이었다. 그곳에서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거짓된 인생의 그릇된 길에 대해서 철저하게 배운다. 그리고 세 번째 오늘 야곱과 요셉의 극적인 만남이다.
오늘 그 세 번째 만남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었다. 고센 땅에서 의젓하게 변한 아들 요셉을 만난다. 그는 대제국의 총리대신이 되어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병거가 등장하였다. 야곱 일행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권세 있는 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고센 땅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올라가서’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야곱 일행이 이주를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8절에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그 애굽 고센 땅에 당도한 야곱을 향해 요셉이 올라갔다는 표현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애굽의 중심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절대 기근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야곱 가정을 살리시기 위해 요셉을 애굽 땅에 파송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오늘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모지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다. 화려한 피라밋을 건설 하며 바로 한 사람을 위한 그것은,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던 영생을 향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영생이신 하나님의 시선은 요셉을 보고 계셨다. 화려한 궁정이 아니라 감옥에서 성실하게 서있는 요셉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기다리셨다. 이스라엘을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고 계셨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현재 고난이란 길목을 통과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세월호의 침몰로 인해 온 나라가 슬픔에 젖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한국교회와 성도가 해야 할 일은 선장을 탓하고 청와대를 질책하는 일이어야 할까? 아니 이 슬픔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저들을 품고 회개하여야 한다. 자신들만 살고자 피했던 선박직원들을 향한 손가락질을 멈추어야만 한다. 오히려 나에게는 이런 이중적인 삶의 태도는 없는지 돌아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요셉이 형들을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며 서로를 탓하지 말라는 주문에서 잘 드러나 있다. 책임을 회피한 선원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있을 것이다.
오늘은 세월호의 참상이 무슨 의미를 가진 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사고를 통해 인간의 연약함과 과학의 만능의 허구를 똑똑히 목격하여야만 한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삶의 질이 높아진다 해도 여전히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무능한 인생들에게 여기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소리 높여 외쳐야만 한다.
요셉과 야곱은 부둥켜안았다 목을 어긋 맞춰 안았다. 소리 높여 울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들 요셉을 만나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요셉에게 있어서는 오늘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눈물이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피 뿌려 나를 사셨다.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는 날, 똑같은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만남을 위해서는 험악한 130년의 세월이 있어야함을 또한 배우는 아침이다. 요셉과 야곱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