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25:1
나발처럼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 거기에 말려 분노하는 다윗,
상황을 진정시키는 아비가일이 있는데 나는 어느 부류입니까?
사무엘이 죽자 온 이스라엘 무리가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장래를 치룹니다(1). 내 자식을 길러 본 사람들은 세계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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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살든, 내 세끼에게 일어난 고통과 비극에 대하여 합리
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은, 그것이 종교적·철학적·사회학적,
또는 심리학적이든,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건 발생 닷 세가 넘어가는데 실종자 확인 작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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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답보상태이니 어쩌면 좋답니까, 어떤 '위로'와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무수한 이들의 기대와 열망과는 달리, 하나님은
인간의 참혹한 고통과 절망스러운 삶의 현장에서 침묵합니다.
역사 이래 하나님은 슈퍼맨처럼 나타나서 고통에 괴로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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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영웅적으로 구하거나 악을 행하는 이들을 그 자리에서
심판하고 벌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
가는 현장에서 그들을 살려 달라는 절절한 절규의 기도 앞에서도,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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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참한 학살을 당할 때도, 인류의 역사 속에서, 또한 세계 곳곳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또는 우리의 기억 세계에서 존재조차 하지 않는
셀 수 없는 끔찍한 살상, 고통, 인권 유린의 현장에서도 '영웅적 신'
은 결코 등장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독생자이며 성육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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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임의 현장에서조차도, 그 하나님은 승리주의적인
"영웅적 신"으로서의 등장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은 가능한가,"라는 근원적인 위기의식과
치열하게 씨름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신학적 위기와 대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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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어찌 보면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받던 신에 대한 이해, 예수에 대한 이해,
그리고 기도에 대하여 가지던 기대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며, 동시에 새로운 대안적 이해들을 제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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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무거운 과제와 힘겨운 씨름을 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절규하던 니체는 그의 시, '미지의 신에게‘에서
"나의 존재 가장 깊이에 있는 당신, 나의 영혼 속에 들어온 당신"
을 그리워하고 알고 싶다는 절절한 갈망을 담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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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게 단순히 "무신론자"라는 표지를 붙이는 것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에서 사실상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은 바로 신이"죽었다"는 부분이
아니라, 죽었다고 선언되는 신,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이 "죽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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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그 신은 '어떠한 신'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세월 호' 사건을 접하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너머의 사건'입니다. 그 배에 탄 476명의 사람들은
단지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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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그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에게는 이
우주에서 유일한 '대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 한 명
한 명의 소중함과 그 유일함에 대하여 예수님은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에서 분명히 드러낸 바 있습니다.인간 존재 그 누구도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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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처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 존재론적 가치를
숫자로 가늠할 수 없다는 것. 이러한 깊은 진리를 예수님은 99
마리를 뒤로하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통계적 수치로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의 가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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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에 깃든 존귀함을 지켜 내기
위하여 치열하게 함께 하는 삶, 이것이 '예수 따름'의 의미라는 것을.
그래서 세월 호에서 구조된 사람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이고,
구조되지 못한 사람들은 신의 '심판'을 받았다는 식의 교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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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왜곡시키고 상실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의 무게를 더욱 가중시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히려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위해 만든 가스실로 엄마의 손을
붙잡고 가던 아이가 "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라고 던진 물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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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단다. " 라고 답했다는 엄마의
이야기가 전해 주는 심오한 신학적·종교적·신앙적 의미를 다시
새겨 보고 싶습니다. 기도하고 절절히 염원해야 할 하나님은
고통과 절망의 현장에서 연대를 나누는 "연대의 신" '포용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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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정의롭고, 평화롭고, 평등한 세계를 향해 책임적으로 헌신할
것을 촉구하는 '책임의 신',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성을 인정하고,
끌어안고, 그들에게 환대의 손을 내미는 '생명과 연민과 환대의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부자였습니다. 인색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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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어리석음"입니다. 그의 아내
아비가일의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기쁨이다"입니다.
현숙한 여인 아비가일은 나중에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공동체 600명을 먹여야 하는 다윗이 양식이 없어서 이 육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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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타계하고자 유다지파의 부자인 나발을 찾아갑니다.
떡 다섯 덩이 때문에 제사장 85명이 죽임을 당한경험이
있었던 다윗이 이번엔 꼬랑지를 바짝 낮추고 ‘내 부하는
너의 부하’라며 아부를 합니다. 미련한 곰 탱이 나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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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누구냐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며 무시를 합니다.
다윗은 그동안 사울에게 갖은 훈련을 받았음에도, 사단이
나발을 통해 분노를 일으키자 가장 힘든 정신적 위기까지
오게 됩니다. 과거 사울에게 보여주었던 성숙한 리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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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분노가 극에 달하여 나발을
죽이고자 합니다. 현숙한 여인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남편의
잘못이 내 잘못이라며 남편의 악하고 미련한 것과 다윗이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는 인생임을 지혜롭게 이해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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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다윗의 마음이 아비가일의 구속사적인 명철한 상황
판단에 의해 가라앉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셔서
죽게 하자, 다윗은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습니다.
살다보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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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이 안 되고 어찌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는 일을 만날 그 때, 여전한 방식으로 오늘의 생활예배를
드려야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아비가일의 안목을 가지고
이웃의 슬픔을 체휼하고 아픔을 나누는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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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휘장을 찢고 은혜의 보좌를 여신 부활의 주님,
엄청난 충격 속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자식을 잃고 비둘기처럼 구구 우는 어머니들에게
찾아가 주옵소서.
(강 남순 / Brite Divinity School, TCU) 교수)
2014.4.20.sun.헤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