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가하다가 망했었던 인생입니다.
작성자명 [김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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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8.02.12
내가, 내가하다가 망했었던 인생입니다.<눅>12;13~21
내가, 내가 하다가 망했었던 인생입니다. 라고 제목을 정해 놓으니
왜 과거형으로 제목을 만들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답하기를 과거는 그렇게 망했었지만
지금은 망한 덕분에 예수님 만나고 말씀으로 살아나 흥하고 있으니
망한 사실은 과거형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입니다.
어제까지는 외식 중에 갈등하다가
말씀으로 회복되어 살아났더니
오늘은 이 한 말씀이 나를 가르치며 교훈합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주님은 오늘 나에게 탐심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한 부자의 예를 들어 교훈하시면서
유난히 눈길이 가는 한 대명사에 집중하게 하십니다.
바로 [내가]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내가라는 표현이 이 짧은 본문 말씀에서 자그만치 5번씩이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내가 내 영혼에게...
이렇게 내가 찬양으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내가 복음]에 빠져서
나의 소유만을 생각하는 지극히 이기적이요 정욕적인 욕심을 보게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탐심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은 오늘 소유의 넉넉함이 나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니라
탐심의 어리석음을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었으며
부자의 예를 말씀하면서
내가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이 부자의 지독한 탐욕과 탐심을 엿보게 하십니다.
내가 아주 종종 오버하여
묵상이 아닌 칼럼으로 흐르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도 그렇게 흐르지 않도록 경계하며 묵상만하도록 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내가라는 말도 잘 사용하지만 [우리]라는 말도 입에 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라는 어휘가 주는 의미와
[우리가]라는 어휘가 주는 의미를 먼저 설명해야 하겠기에
그러다 보면 자칫 칼럼인지 묵상인지 나도 구분이 모호할 때가 있었기에 하는 말입니다.
내가라는 말의 의미는 강한 개인 소유의식으로 이기적인 냄새가 나고
우리라는 말의 의미는 공유의식으로 이타적 개념을 지닌 어휘로 구분지어집니다.
오늘 부자를 보니까
내 모든 곡식과 물질로 내 곳간 채울 일로만 혈안이 되어 있음을 봅니다.
아주 대단한 소유욕과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탐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놀부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구두쇠, 수전노의 세속적 탐욕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나도 한 때 이 부자처럼 내 곳간에 내 물질과 내 곡식으로 채우려다
그만 망해버린 인생입니다.
나만 잘되어야하고
나만 살아 남아야했고
나만 즐길 수있어야했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더 교만해야 했고
더욱 완악하고 강퍅해야 했었던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함은 없었고 내 정욕을 채우는 일에만 몰입했었습니다.
나에게는 나만 있었기에 남이 들어 올 자리는 없었고
그 자리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도
아들딸에 대한 사랑도 내 정욕을 채우는 도구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섬김, 낮아짐, 겸손 등과는 거리가 있는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왔었는데
결국 나는 나만을 위한 이러한 삶에 실패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를 부르짖다가 망했었던 인생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망했다고 하는 것은
물질을 잃었기에 망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잃었기에 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도 잃었지만 그것에 대한 아까움보다는
[우리]의 잃어버림에 대한 상실감이 더욱 큰 상처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정을 나눌 친구도 없어졌고
그 많던 혈육도 가까이에 있지 아니합니다.
아니 심지어 아내마저 떠나 가정생활은 파탄 났고 아들딸과는 이산가족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내가 복음에 빠져 잘 못살아온 내 삶의 결론으로 매듭지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와 우리를 이룰 공동체가 없어졌고
세상에는 나만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는 내가를 부르짖다가 [우리가 실종되어 망한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래서 바뀌어야 했는데
그래서 내 삶과 마음에
내가가 사라져야 하는 데 나는 역시 그렇게 쉽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머리에만 있었던 복음이 가슴으로 내려오기 이전에는
내 마음 속에는 여전히 [내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가 너무 강하니 예수님께서 함께하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입술로는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놓고 산다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가 주인이요 예수님은 내 안에서 쪽방을 월셋 방으로 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가]가 쫓겨나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것이
광야의 불같은 연단과 시험과 훈련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나에게 광야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예수님께는 셋방을 드리고
나는 안방을 차지하고 주인 노릇을 하며 [내가 복음]을 부르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광야의 연단이 소중하고 반드시 필요한 축복의 통로로 믿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내가 복음 속에서
예수님보다는 내가 나서서 주인 노릇 하려는 경향이 남아있습니다.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 죽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님만 살아계시기를 갈급함으로 소망합니다.
그래야 빨리 광야가 끝이 날 텐데...
아직 광야가 끝나지 아니했기에
내가 더욱 말씀의 예방 주사를 맞으며 십자가의 행전을 광야에서
써 나가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 나에게는 [우리]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가정 공동체가 소중하기에 혹시나 하며 기도하고 있고
그 중에 교회 공동체는 나에게 너무도 소중한 가치로 존중되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내가를 완전히 죽이며
오직 십자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공동체에 잘 묶여 있기를 소망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