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에라도
작성자명 [박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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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8.02.12
2008-02-12(화) 누가복음 12:13-21 ‘오늘 밤에라도’
엊그제 주일에 멀쩡하던 휴대폰이 갑자기 고장이 났습니다.
어제 아침, A/S 센터 앞에 내려주며 아내가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큰 소리 치지 말라고, 화나도 참으라고...
구입한 지 몇 달 되지 않았는데 메인보드가 고장났다는 말에
저장된 자료는 살릴 수 있는지 물었더니 그것도 불가능하답니다.
떨어뜨리거나, 물에 빠뜨리거나
오래 된 것도 아닌데, 가입비 할부도 끝나지 않았는데
통신사까지 옮기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자료도 살릴 수 없다니...
지체들 전화 번호, 틈틈이 찍어 보관한 삶의 모습들,
연휴 때 찍은, 잘 나왔다고 좋아하던 아내 사진 한 장 살 릴 수 없다니...
화가 나서 거친 말이 나오려는 순간 아내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선택은 두 가지, 10 여 분 기다려 포맷해서 그냥 쓰느냐,
새 보드로 무상 A/S 받는 대신 1 시간 이상 참고 기다리느냐...
1 시간여를 기다려 기억이 다 지워진 기계를 받아들고
전원을 켜니, 고장 났던 동안에 왔던 메시지, 전화 내역이 창에 떴습니다.
내가 저장했던 자료는 없어졌어도
내 번호가 없어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일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20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런데 오늘 밤에라도 주님이 내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멀쩡한 자료가 다 지워지듯,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없어지고
나도 이 땅에서 조용히 지워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이름 석 자로 남으면 뭐 하나,
남겨진 내 가족은 어떻게 되나? 그래서 많이 남겨야 하나?
잠시 부질없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기댈 게 많아서 아버지를 떠나 살았던
나 혼자서 능히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은 교만 때문에
아버지 없이 살려 했던 지난날이 생각남에
기댈 게 많게 해주는 것보다
아버지만 의지하게 해주는 게 더 큰 사랑이라고
그래서 없는 게 다행이라고
있어도 남기면 안 된다고 애써 자위하는 중에도
며칠 전 들은 아들 녀석의 말이 생각납니다.
화장실에서 석유가 펑펑 나왔으면 좋겠다는...
산유국의 꿈을 잠시 꿔보았다고 둘러댔지만
동화 속 얘기 같은 대학생 녀석의 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러나 지금의 내 환경이 최고의 환경이라는 목사님 말씀이 생각나고
그 말씀이 지금 생각나는 이유가 깨달아짐에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내 영혼이 언제 주님의 부르심을 받더라도
삶의 모습이 교훈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많이 남기는 대신 큰 걸 남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