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1일 월요일
창세기 37:1-11
“갈등”
오늘 갈등의 이유는 편애로부터 출발한다. 그 이유를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고 설명하는데 그 뿌리는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라고 소개하는 대목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춘다. 철있는 편애는 철없는 철부지를 만들었다. 이복형들의 허물을 고자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요셉의 행동은 편애에 대한 삐뚜러진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의 노골적인 편애에 대해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보았다는 것이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하였으나 이로 인해 나머지 형들로부터는 배척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가 연이어 꾼 꿈이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되게 만들게 된다. 꿈 때문이 아니라 꿈을 자랑함으로서 문제가 커진 것이다.
요셉에 있어서 형들의 단들이 자신의 단을 향해서 절하는 장면은 흥분할 만 하였을 것이다. 자신을 따돌리는 형들에게 어쩌면 복수하는 심정으로 이야기 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로 인해 더욱 형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같은 내용을 두 번 씩이나 거듭해서 꿈을 꾼다는 것은 요셉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열 한 별과 해와 달도 함께 요셉을 향해 절하였다며 진전된 꿈을 야곱과 형들에게 이야기 하였다. 이러한 요셉을 향해 형들이 ‘꿈꾸는 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는데, 그의 일생을 만들어간 것도 꿈이었다.
편애의 끝은 돌이킬 수 없는 막장 드라마처럼 막다른 골목까지 치닫게 된다.
야곱의 인생이 뒤틀린 것 역시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더 사랑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고 편애의 희생자였다. 그러했음에도 대를 이어 반복되는 역사를 보면서 죄의 뿌리 속에 심겨져 있는 가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하신다. 인생들의 거듭되는 실수를 참으신다. 기다리시고 바꾸어 가신다. 뒤틀린 인간들을 바로 잡으신다. 야곱을 인도하셨다. 오늘은 요셉을 인도하신다. 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창조주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제대로 살아야할 이유가 있다.
야곱 역시 꿈꾸는 자였다.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이 그를 삶의 지탱해오고 지금까지 인도해 오셨음을 기억했다. 그러한 야곱이었기에 요셉을 나무라면서도 요셉의 꿈을 그의 가슴에 담는다.
나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본다.
“꿈은(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