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7일 목요일
창세기 35:16-29
“죽음”
오늘은 슬픔의 날이다. 한 여인을 사랑해서 칠 년을 수일처럼 여기며 기다린 여인이 자신의 소중한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된다. 그 여인이 라헬이었다. 그녀는 죽어가면서 베노니라고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많이도 기다려왔던 아이였다. 그러나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채 어린 것을 놔두고 떠나야만 하는 어미의 마음에 그의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야곱은 슬픔을 이기고 그의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베냐민이라고 부른다.
라헬이 출산 중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녀의 시아버지인 이삭은 백팔십 세에 천수를 누리고 열조에게로 돌아간다. 그때 야곱의 나이가 백이십 세였다. 가장 소중했던 사람들이 떠나는 아픔 중에 맏아들이었던 르우벤이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동침한 소식을 듣게 된다.
이것이 축복 받은 인생이었을까?
적나라한 삶을 이처럼 가감 없이 기록하여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인간 도덕의 기준에도 못 미치는 인생들을 선민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은혜’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라헬과 이삭의 죽음 사이에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을 부르신다. 사분오열된 콩가루 집안이었다. 이삭이 죽기 삼년 전, 요셉을 팔아버리고는 죽었다고 늙은 아비에게 거짓을 고한 때였다. 이들의 대표격인 장자 르우벤의 행동은 이중적이다 못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여동생 디나의 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살상을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자신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성욕은 다스리지 못하는 이중적 인간들이었다. 어디하나 들어 쓸 만한 인물들이 없다.
정말 가관인 집안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연약한 인생들을 통해 다음세대를 준비하고 계셨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계셨다. 더 나아가 바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는 생각이 미치자 사천년의 세월이 일순간처럼 느껴졌다. 내가 르우벤이었구나. 등 떼밀려서 세겜을 떠났지만 아직도 나에게 잔존하고 있는 옛사람의 습성들은 애굽을 동경하고 있었다.
주님의 모습을 본다. 제자 열둘을 부르실 때,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야곱의 열두 아들과 닮아도 너무 많이 닮았음을 본다. 그 닮은 꼴 중 하나가 바로 나인 것을 바라보며 오늘도 변함없이 연약한 자들을 들어 쓰셔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룻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