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1일 화요일
사무엘상 6:19-7:2
“호기심 때문에”
오늘은 슬픈 날이다.
법궤 때문에 벌어진 블레셋에서 일어난 엄청난 재앙을 들었음에도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에 호기심이 일었다. 보지 않아야할 법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오만 칠십 명이 일거에 죽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법궤가 돌아옴을 기뻐하며 번제를 드리며 즐거워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재앙으로 인해 통곡의 땅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입으로 고백한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세말로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보지 않아야할 것을 보았다.
그들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다.
오늘 내가 보아야 할 것은 나의 잘못과 그 잘못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어제 가족예배를 드린 후, 자녀들과 함께 대화가 시작되었다. 예배 인도자를 정하는 문제로 시작된 이야기의 끝은 나의 삶의 태도에 대한 지적이었다. 대화 속에서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내 자신이 한 번도 알지 못했던 내 모습을 보게 하셨다. 나의 삶의 패턴이 가부장적이라는 것이다. 대화가 일방적인 통고이기 때문에 아이들 입장에서는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마음이 많이 아파왔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나의 삶에 대해서 다시 살피게 하셨다. 아이들의 말이었지만 나의 마음에는 선지자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아! 내가 그랬었구나! 가벼운 탄식이 신음처럼 터져 나왔다. 나의 마음에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젖어오고 있었다. 나의 연약함을 보게 하시며 새로운 출발점으로 나의 시선을 향하게 하셨다. 제 삼 자의 눈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죽어야 할 또 다른 내가 있었다.
벧세메스 사람들의 실패는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뉘우치기 보다는 엄하신 하나님으로 마음속에 각인 시켰다. 등을 돌린 것이다. 가인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가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니이까?” 반문하며 대들고 있다.
나는 어제 자녀들의 입을 통해 죽어야할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하셨다. 아프지만 기뻐할 수 있다. 변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내 생각을 죽이기로 했다. 내가 먼저 낮아지기로 결정한 것이다.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이 바로 내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