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11-21)
어제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무엘을 이미 낳은 한나의 기도의 상당부분이 ‘지식의 하나님’ ‘주권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교만한 말, 오만한 말을 하지 말고(3).. 하나님이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음(6)을 길게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46909;금없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 사무엘을 허락하신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찬양해도 이 대목에서는 충분한데...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오늘 말씀을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아들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였는데, 금쪽보다 더 귀한 내 자식을 맡아줄 엘리 제사장은 피끓는 기도와 술취함도 구별치 못하는 영치이고, 같이 자랄 그 자식들은 제물에나 관심을 갖는 도둑놈들이니... 아무리 제사장 집이라도 맡기고 싶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16절의 ‘그 사람’이 지적하였듯이 한나도 엘리와 그 아들들에게 바른 지적질을 하고 욕하고 싶었을 터인데...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3)’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단속하는 모습이 놀랍습니다. 그리고 어느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한나의 믿음이 놀랍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들을 위한 옷을 매년 만들어 입히는 실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렇듯 한나의 기도와 믿음에 의해서인지, 엘리 앞에서 자라는(11) 사무엘이 결국 여호와앞에서 자라니라(21)라고 서술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어제부터 ‘교만과 오만’이 계속 묵상이 되는 것 보니... 저에게 뭔가 걸리는 것이 있나 봅니다. 직장에서도 보직자 대해 순종이 안되는 맘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힘든 일에 대해 내 나름의 판단이 앞서는 것도 회개가 되고, 쌓인 산더미 일에 남 탓의 생색이 올라오는 것도 맘에 걸립니다.
그 ‘교만과 오만’의 결정체가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보여줍니다. 혹시 아직도 내 손에 쥐어진 ‘세 살 갈고리’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 과장 위주의 과운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겠습니다.
적용> 쉽게 변하지 않는 과 식구에게도 지레 판단치 않고, 인내와 섬김으로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