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24 시편31:9-24
주께 피하는 자
큐티를 하다보면 오늘 주어진 말씀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사건이 떠오르고 그것이 묵상되어 본문 말씀에 최대한 맞춰보려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이 아닌가보다~' 하며 어떻게든 형식적으로 그 날의 말씀에 맞춰서 생각을 구겨 넣습니다.
오늘의 경우, 몇 년 전 우리 딸에게 잠시 영어 과외를 해주었던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냥 밑도 끝도 없이 그 과외 선생님의 뼛속까지 크리스챤인 외양과 언어, 사고방식이 사람을 질리게 하고 딸과 저에게 별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고 과외가 씁쓸하면서도 짧게 끝났던 기억이 전부입니다.
남이 피우면 바람이고 내가 피우면 진정한 사랑인 것처럼, 제 눈에는 그 선생님의 생활 속 게으름과 외식으로 보이는 많은 행동과 언어들이 행위 없이 지식적 믿음만 강조하는 전형적인 엇나간 신앙으로 비춰졌고 그것에 치를 떨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깊은 슬픔과 탄식으로 뼈가 아플 정도의 고통 가운데 처한 다윗의 시편인데 내 머리는 온통 그 선생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때, 나는 묵상을 멈추고 그저 본문 해설과 간증만 읽고 묵상을 끝내야 합니까? 아니면 기도하고 질질 끌며 하나님 오늘 왜 이 생각 주셨습니까? 하며 매달려야 합니까?
큐티의 선배들이여, 도움을 주소서~~~ ㅎㅎ
그런데 오늘은 하나님께서 저의 이런 큐티에 작은 열쇠 하나를 던져주셨습니다.
바로 제 안에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깊은 죄악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여호와여’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원수’ 와 ‘대적’으로 느껴질 만큼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옥죄여 오는 주변 사람들이나 사울에 대해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고 호소하는 것을 봅니다. 사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합니다. 고발을 해도 너무 심하게 고발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솔직함과 고발의 시선이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고정되어 있어서 그 분께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시를 읊었을 때, 다윗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고백으로 모든 기도에 응답을 얻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음이 깨달아집니다.
제 눈에 답답하고 짜증스럽게만 보였던 그 과외 선생님과 저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서면(stand) 어느 하나 다를 바가 없는 죄인입니다. 둘 다 스스로의 죄성으로 더럽혀진 채 깊은 슬픔 속에 탄식하며 뼈가 쇠하는 고통의 순간을 지녔습니다. 별 인생이 없는 죄인들끼리 서로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때 그 인간이 그랬지’ ,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행동해?’ 하면서 용서를 못하는 걸 봅니다. 아니, 최소한 제가 그렇습니다.
'사소한 억울함' 과 '잊지 못 할 억울함' 이 분명히 다르겠지만 둘 다 용서를 잊은 죄악이라는 기본적인 이름표를 달고 있기에 우리의 영혼은 약하고 뼈가 쇠하여 지는 것을 봅니다.
억지 해석이 아니라 오늘 22절 말씀처럼 우리는 모두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며 놀라 외치는 죄인들일 뿐만 아니라, 믿음의 선배 다윗처럼 깊은 영성으로 여호와 한 분만을 신뢰하고 바라보는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주께 부르짖지도 못하고 말씀이 있어도 올바로 묵상하지 못하고 그저 읽고 휘리릭 지나가는 우매한 자들임이 느껴집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끊어질만큼의 죄인이라면 누군들 용서를 못하고 이해를 못할까요?
제가 한 때 용서하지 못하고 업신여기던 그 선생님 역시 저를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지는 않고 있겠지만 최소한 저를 미워하지 않으리라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집니다.
오늘 하루, 내 행동이 믿는 자에게든 믿지 않는 자에게든 진실하기를 원하며, 교만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23절) 그래서 하나님께서 갚으시는 엄중한 벌이 아닌, 어떤 위기에서도 강하고 담대한 도우심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4절)
적용}
늘 내 죄보다 내가 당하는 고난과 미움이 훨씬 작다는 것을 잊지 않는 다윗의 후손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그 선생님보다 제가 더 악하고 게으른 외식하는 크리스챤이었음을 인정하고 미워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