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정신을 찾아서...
작성자명 [김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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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12.15
사사기는...
범죄의 악순환과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암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뉘우칠 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죄의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임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회복의 책이기도 하다!! (아멘!!)
죄로 인하여 많은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총 8-9차례의 싸이클)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여러 사사들을 통하여
적들을 물리쳐가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
오늘은 그 유명한 삼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삼손의 어머니는
죄로 인하여 피폐하고 생명력없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예표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여인에게 하나님은 어느 날 나타나셔서... !!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영적 전쟁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전쟁은 무엇인가?
우리는 친구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진정한 친구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진정한 적인 사단을 분별치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짜 적인 암몬을 두고도
서로 가장 가까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는 싸우고 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내용이 있어 뒤져 보았더니 은혜로 정확한 책을 찾게 되었다.
이제 아래에 옮겨보고자 하는 내용은
헨리 나우웬의 멘토이자 라르쉬 공동체의 창설자였던
장 바니에의 <공동체와 성장>이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솔직히
이런 내용을 올린다는 것은 부담이 되지만...
(나 라는 그릇에 비해 내용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부를 수 있는 주님의 이름에 의지하여서... 한 걸음 앞으로.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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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성장> 중 / 공감과 반감
-장 바니에-
공동체 내부의 두 가지 큰 위험의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친구 와 적 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닮은 이들과는 아주 쉽게 어울린다.
우리를 즐겁게 하고 우리의 생각과 인생관 및 유머 감각을 이해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고자 한다는 점은 우리 모두가 같다.
우리는 서로를 부추기며 서로 아첨한다.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오.
당신도 그래요.
그러니까 우린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오. 영리하고 총명하거든요.
인간적인 우정은 자칫하면 상호 인정과 상호 아첨으로 폐쇄된 범인들의 패거리 관계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정은 계속 성장하고 형제 자매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고
우리가 부여받은 선물에 충실하지만,
성령께 더욱 관심을 기울이도록 부추기는 자극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사막을 가로질러 해방의 땅으로 가는 발길을 멈추고 서 있게 된다.
그리하여 우정은 오히려 숨을 막아 버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만다.
그런 우정은 노예살이의 한 형태인 감정적 종속으로 변질된다.
공동체에는 반감 도 존재한다.
우리와 의견이 다르고, 우리를 방해하며, 우리에게 대들고,
우리의 삶과 자유라는 소중한 보화를 숨막히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되며
우리의 내심에 호전성을 불러일으키거나 아니면 일종의 비굴한 퇴행을 유발한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우리 자신을 표현하기가 불가능하게 보이며
심지어 제대로 살 수 조차 없을 것처럼 생각된다.
우리에게 시기와 질투를 촉발시키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광채와 번뜩이는 개성은 우리의 빈곤을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되고 싶은 그런 존재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다.
끊일 줄 모르는 그들의 정서적 욕구는 우리를 감당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멀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적 이다.
그들은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는 비록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들을 미워한다.
물론 그 같은 증오는 심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고의적인 것이 아닌 이상 윤리적인 증오는 못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자취를 감추거나 죽어 버리면 우리는 해방을 맞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러한 장벽은 다른 개성들 사이의 매력이나 마찬가지로 자연 발생적인 것이다.
이런 것은 정서적 미숙에서
그리고 우리로서는 통제가 불가능한 유년 시절의 온갖 요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감정적인 반응에 끌려 다니다 보면, 이내 공동체 안에는 분파가 형성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격리시키고 담을 쌓는 사람들의 집단일 뿐,
더 이상 공동체는 되지 못하고 만다.
어떤 공동체를 찾아가 보면 그런 긴장감과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를 곧바로 느낄 때가 있다.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다.
밤바다에서 배들이 스쳐 지나가듯이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공동체는 구성원들 대다수가 이러한 장벽을 의식적으로 타파하고
그들의 우정 이라는 누에고치 속에서 빠져나와 적에게 손을 내밀 때,
비로소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하지만 그러한 여정은 길이 먼 여정이다. 공동체는 하루아침에 건설되지 않는다.
사실상 공동체는 결코 완성될 수가 없다.
보다 심원한 사랑을 향해 성장해 나가든가 퇴보하든가 할 뿐이다.
우리의 적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우리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도 못하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할 수도 없다.
그들의 공격이나 그들의 지배력이 우리를 질식시킨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도망을 친다. 아니면 그들이 사라져 주기를 염원한다.
사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의 나약성, 미숙함, 내적 빈곤을 자각하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가 마주 대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비판하는 그들의 과오는
실상 우리 스스로 대면하기를 꺼려하는 우리 자신의 과오인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를 비판하고 또 다른 어떤 이상적인 공동체를 추구하는 이들은
흔히 그들 자신의 결점과 약점에서 도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불만과 상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시오.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며
여러분을 헐뜯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오.
당신의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편 뺨마저 내미시오.
당신의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마시오.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을사랑한다면 여러분이 무슨 은혜를 베푼단 말입니까?
사실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눅6:27-29, 32)
우리에게 휼륭한 성품밖에 보이지 않는 친구가 있다면 그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그는 우리 안에 활력과 행복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다.
그는 우리 자신을 알려주며 우리를 자극시킨다. 바로 그때문에 우리는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원수는 우리 내부에 우리가 대면하고 싶지 않은 감정들,
그러니까 공격성과 질투심, 공포감과 그릇된 의존심, 증오감들
-우리 내부의 암울한 세계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우리 자신이 빛과 어둠, 긍정적인 자질과 결함, 사랑과 증오심, 이타심과 이기심,
성숙과 미숙의 혼합체라는 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세계를 끊임없이 적-나쁜사람, / 친구-좋은 사람으로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내부와 주변의 장애물을 쌓고 편견을 확산시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약점과 결함을 지녔고
그래도 여전히 내적 자유와 보다 참된 사랑을 향해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 때,
우리는 사랑의 자유로 성장할 능력을 지닌 다른 사람의 약점과 결함 역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현실성과 사랑을 두루 갖추고 모든 남녀를 주시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을 수박에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장이 가능한 까닭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