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제가 듣는 말씀들이 다 구약입니다.
상벌의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만일 제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러한 벌을 받는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요즘 구약을 보면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또한 묵상합니다.
오늘 본문을 웃시야가 잘나가다가 교만해져서 벌을 받는데
우상을 섬긴것 아니고 누구처럼 살인을 한 것도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도 아닌데
나병으로 별궁으로 쫒겨나 여생을 살았습니다.
왜?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인격적인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나병이 걸려 홀로 별궁에서 지낸 웃시야는 무엇을 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했을것 같습니다.
나라를 강성하게 하고 또 자신을 벌하신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별궁에서 회개를 했는지 이를 갈았는지 역대하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무 할 일이 없어진 웃시야는 하나님과 자신을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더 사랑한 웃시야에게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하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일 웃시야가 별궁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났다면
나병의 고난은 그에게 축복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회개하지 못했다면 나병의 고난은 인생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잘나가는 왕으로 그대로 두셨더라면 회개할 기회가 없었을터인데
전부 빼앗고 따로 떼어내어 그를 두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단지 상벌의 하나님이 아니라
끝없이 한쪽 사랑을 하시며 포지하지 않으시는 인격의 하나님임을 묵상합니다.
어제 목사님께서 아무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말씀을 볼 수 있었다 하셨는데
만일 웃시야가 고난의 때를 잘 견디었다면
그의 나병의 고난은 사실은 축복이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저의 삶에서 나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축복이었는지
돌아보면 이제는 저에게도 이야기할 하나님과의 사연들이 조금 있습니다.
말씀이 없다면 그저 혼돈과 우연의 이야기들뿐이었을 것인데
인격적인 하나님과 말 안듣는 저와의 사연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바로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며 말씀이 들리는 것임을 배웁니다.
웃시야를 사랑하셔서 나병을 주시기까지 그와 독대하시고 싶었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도 제가 교만으로 마음이 뺏기는 것을 버려두기보다는
결국 환경의 변화를 통해 저의 마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님, 하나님의 벌이 가혹하다 느낄 때, 이 짐이 내게 너무 무겁다 느낄때
다만 말씀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