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수요일
제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25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이 준비한 조반을 먹은 후에 주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사랑을 보이신 후에 물으신다.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 주님이 비교를 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걸 봐서는 베드로의 맘 속에 이미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는 열등감이 자리잡았을 것 같다. 항상 주님의 수제자로 앞서서 열정을 보였던 베드로, 그러면서 얼마나 마음 한 가운데에 자랑스러움이 있었을까? 주님께 인정받는다는 스스로의 우월감, 다른 제자들보다 내가 낫다는 우월감, 그만큼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하는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는 건 괴롭고 힘들고 슬픈 일, 낙심되고 실망되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내 꼬라지가 이 모양이었다니. 이 수준이면서도 혼자 자기만족감에 우쭐되었었다니... 그런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도 부끄러웠을 것이고, 마주하기가 힘들었을 베드로를 먼저 아시는 주님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또 물으시고 또 물으신다.
그 첫 번째 질문에 아~ 주님은 나를 아시는구나! 내 고통과 번민, 번뇌를 아시는구나! 그리고 이해해주시는구나! 용서해주시는구나! 용납해주시는구나! 얼마나 반갑고 감사했을꼬 이제 대답은 자신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그런데 또 물으신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답하는데도 예전의 베드로가 되어 흥분이 된다. 그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충만감이 든다. 주님이 주시는 온기, 섬김, 허기도 채워지고, 육의 힘도 충전이 되었다. 게다가 내 주님이 내 옆에 계신다. 이렇게 바로 옆에 바로 내 옆에 계신다. 나는 다시 천하를 얻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목소리도 커졌다. 열정이 다시 살아난다. “그렇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 우리 주님이 아시고 계시지! 내가 사랑하는 줄 우리 주님이 알고 계시지! ” 주님의 눈빛과 음성에서 주님의 사랑을 읽었다. 나를 신뢰하고 믿어주고 지지하는 주님의 사랑이다. 내게 또 오셔서 조반을 차려주시기까지 하시는 내 주님이시다. 감격이다.
그런데 주님이 또 물으신다. 이건 뭔가? 내 확신에 또 뭐가 잘못되었을까? 정체감이 흔들린다. 지금의 이 감정, 이 생각,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다. 확신이 없다. 나를 또 돌아보게 된다. ‘내가 예전에도 이랬었지, 이렇게 자신감이 충만해서 큰 소리쳤었지.... ’ 근심이 된다. 정말,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 맞는가? 주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줄 아시는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다시 되묻고 되물어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심에 분명하다.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확신은 분명하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잖아요? 내 속을 아시잖아요? 내 모습을 아시잖아요?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잖아요? ” 다시 주님께 호흡을 고르고 다시 여쭙는다. 맞지요? 주님! 주님도 저랑 같은 생각이신 거 맞지요?
내가 평생 물었던 질문이었다. “주님, 저를 사랑하시는 것 맞나요? 다른 사람 아니고.... 은경이, 은숙이, 현숙이, 미경이... 걔네들을 사랑하는 줄은 저도 알겠어요. 그런데 주님, 저를 사랑하시는 것 맞나요? 저를 아시잖아요? 저예요. 현희.... 현희, 저를 사랑하시는 것 맞나요?” 그런데 우리 주님도 내게 물으셨던 거다. “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 맞니? 네 남편 말고, 네 자식 말고, 네 친구 말고.... 네 엄마 말고.... 내가 네게 준 사람들 말고, 나를 사랑하는 것 맞니?” 그 질문을 들으며 주님의 갈급함이 보인다. 뭐에 부족할 게 있으시다고, 나같은 애한테 목을 메고, 사랑하는지 묻고 묻고 또 물으시는지... 왕이신 우리 주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그렇게 물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다. 그렇게 내 이름을 친히 부르시며 그 음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도 감사다. 그게 우리 주님이시다.
사랑... 나는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사랑에 목이 말랐다. 그런데 그 사랑을 우리 주님이 내게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나를 안아주신다. 우리 주님이 내게 사랑을 채워주신다. 그럼에도 사건과 환경 가운데 일희일비하는 나다. 절대적인 사랑, 완전한 주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관계 가운데 사랑을 받아야 하고 특히 남편에게 사랑을 받기를 갈구한다. 그런데 내게 중요한 그 남편은 나를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나를 부인하기도 한다.
어제 회식이 끝나서 혹시나 싶어 전화를 했는데 내가 있던 그 주변이었다. 차있는 일행이 먼저 가서 차가 없어 그 차를 사용하겠다고 하고 갔는데 마침, 그때 남편도 회식이 끝나 나온다. 우리 멤버에게 소개하고 함께 차를 타고 오려고 기다렸는데 저 멀리서 나를 보고는 손사래를 친다. 빨리 가라고 한다. 부끄럽단다. 왜 부끄러울까? 남편은 왜 부끄러울까? 내가 자랑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나를 부인한다. 그리고 남편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 역시 부끄럽다고 부정하는 게 많다. 안타깝다. 섭섭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언젠가 아들이 발에 깁스를 했을 때, 남편은 아들과 멀리 떨어지고자 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주님이 십자가 지셨을 때, 멀찍이 따라갔던 제자가 내 모습이다. 기적과 표적을 보일 때 자랑스럽게 의기양양 함께하며 양육받는 게 자랑스러웠던 나다. 그런데 십자가 옆에는 내가 없었다. 호언장담, 끝까지 함께할 것 같은 나였지만 내 생각과 판단에 견딜만한 것 아니고는 도망 다닌다.
그러기에 주님이 오늘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너무도 잘 아는 주님이시기에 그렇게 물으시는 그 질문에 내가 보이기에 근심이 된다.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아시듯, 내가 또 주를 배신하고 부인하고 부끄러워할 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하시는 주님의 사랑, 베푸시는 주의 은혜, 그래서 제 대답은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일 수밖에 없네요. 제가 장담할 수 없지만, 또 부인하고 배신할 수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의 제 고백은 주를 사랑합니다. 맞습니다. 주님, 주를 사랑합니다. ” 이제 걱정하지 않는다. 근심하지 않는다. “내가 비록, 또 부인하고 또 도망하고, 주께서 보여주시고 알려주셔도 내 일상에서 또 여전히 무너질지라도.... 주께서 차려주시며 나를 안아주셨던 오늘 여기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다시 주님 품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주께서 제게 명하신 명령을 좇아 순종하겠습니다. 또 돌아오겠습니다. 주님, 괜찮지요? 내가 비록 약하여 주께서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저이지만, 그럼에도 품어주시는 주님, 한 번도 부끄러움투성이 나조차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를 아시고 불러주셨던 우리 주님 앞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감히, 제 일상에서 주를 부인하고 모른 척 외면했을 지라도 주 품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 주께 사랑을 확인할 때는 언제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줄 알고나서는 또 주를 부끄러워하며 모른 척,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건 피했던 저를 용서하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 찾아와주셔서 사랑을 확인해주시고, 주님의 질문에 나를 돌아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나의 흔들리는 정체감, 근원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감사합니다
나의 부끄러움의 근원을 묻겠습니다.
남편에게 사랑을 충족 받을 수 없는 한계 있는 인생임을 인정하고,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남편의 필요를 채우겠습니다. 예배 가는 동안, 깊은 대화를 하겠습니다.
아들에게 하는 사랑의 표현으로 닭고기 요리를 해놓겠습니다.
적용******************************************************************************
나는 뿌리가 견고하지 않다. 말씀을 깨닫는 것도 적용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건 나의 새로운 뿌리가 되어주신 예수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는 것, 그날 그날, 또 예배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먹고 먹고 또 먹는 것. 그 말씀에 비춰 회개하며 기도하는 것 그게 내 최선인 것 같다. 나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부끄러운 것, 그건 내 뿌리에 대한 근원적인 흔들림이다.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내 존재 자체가 파괴당하는 경험, 가라앉아있던 거절감과 수치감이 수면위에 또 떠오른다.
예배 가는 동안, 전화 상담하느라 대화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그래도 남편과 얘기를 하면서 나를 보게 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오가는 길이 편안하게 해주신 후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다리도 안 아프고, 앉아서 편안하게 다닐 수 있게 해주신 우리 주님이시다.
아들들이 만족스러워한다. 나도 기쁘다. 맛있게 먹어주는 아들들, 주님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