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남자곁에서.....울고 싶어요
작성자명 [안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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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06.23
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때
우는 남자
그런 남자의 눈물에 말을 달아주는 여자
제 남편
한창 꿈을 펼쳐야하는 나이에 그만 아버님께서 돌아가시여
학문을 포기하고
홀 어머님과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그 기막함에
하루는 청산카리를 먹고 죽을려고 한강에 나갔대요
자전거 위에서 바라보는 별은 의외로 빛나고
그만 거기서 이 남자
에서인듯
야곱인듯
요셉인듯
방성대곡했대요
생계속에서도 여전히 학문에 미련있어 대학을 세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다한 이 남자
이 남자의 눈물곁에서 이제껏 말을 달아주며 살아 온 덕분에
오늘은 요셉의 눈물에 말을 달아주는 여자가 되었네요......ㅎㅎㅎㅎ
요셉은 의외로 잘 울었습니다
대단한 의지의 남자임에도 그 의지로도 어찌 할 수 없을 때
터쳐나오는 요셉의 눈물은 사실 묵상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눈물이지요
형들을 만나 울고
아버지를 여워 울고
아직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형제들을 보고 우는 남자
저마다 독특한 기질들이 있음에도
아버지를 구심점으로 연합되어지던 열두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이제껏 그들의 심연에 가라 앉아 있었던 것을 잇슈로 등장시키게 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죄책감이 주는 쓴 뿌리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해주었듯이 주님께서도 분명히 나를 용서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회를 타고 올라오는 죄책감은 사죄의 은혜와 나아가 자유와 기쁨과 평강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도록 만드는 쓴뿌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생전의 아버지 야곱은 22년간 아들들에 의해 속아 살았음에도 그로인한 어떠한 징계나
언급 없이 17년을 살다 가셨습니다
왜 야곱은 그 아들들에 관한 부정한 행위를 놓고 가타부타 말이 없었을까?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그 은혜와 영광이 아들들의 잘못된 행위를 덥혀주고도 남음이 있도록 만들었겠지요
22년동안 속아 살은 자신도 피해자이지만 자기보다 더 극심한 피해자였던 아들 요셉도
그와마찬가지라는 걸 야곱은 알았을 것입니다
역사는 가끔 그런 질문을 하지요
특히 일제 강점기시절
그렇게까지 민족에게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냥 나두면 쓰겠냐고?
진정한 역사의 정기 회복을 위하여
진정 우리들이 가져야 할 정신은 무엇일까?
오늘 요셉의 눈물에 말을 달며 한번 찾아보네요
요셉은 자기가 아무리 죄를 용서해주었을지라도 형들의 죄책감을 없애주기엔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가 싶네요
그가 형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번 더 자신의 행동을 강화시켰던 것은 형들의 아이들을 양육해주겠다는 약속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육안으로 보이는 아버지 야곱을 잃은 형들에게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심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의 눈물은 아무리 아무리 형들에게 잘해주어도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과 맞딱뜨렸을 때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나도 그런 순간이면 한 방울의 눈물이 수만 마디의 명언보다 훨씬 좋을텐데 과연 그럴 수 있을런지 자신이 없네요
비록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기근으로부터 보호하여 육체의 생명들을 보존하였을지라도
죄로부터의 자유함은 결코 줄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칠 때 흘리는 눈물을 보며 나도 그런 눈물 흘리고 싶어지는 아침입니다
분명 죄를 용서해주었고 또한 나 역시 용서받았는데도 어떠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또 다시 치밀어 오르는 쓴뿌리 앞에서 얼마나 나는 눈물을 흘렸을까?
나도 나를 용서해 주어 나를 편히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데 그게 안되여 괜한 주변 사람들 붙잡고 나를 장황하게 설명하려고 용쓸 때가 있지는 않았었는지..........
이 사회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적은 종이를 목에 걸고 혼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되지요
참 그 용기가 부럽기도 하고 저렇게까지 하면서 드러내지 않으면 아니될 절박함임에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에 나의 한계성을 느낍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절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의 사연을 듣고 그 아픔에는 동참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작은 필요는 채워 줄 수 있겠지만 최종적으로 그들의 가슴속까지 후련하게 해 줄 수 있을까요?
요셉이 형들에게 한 말이 결국 그런 말이지요
내가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그들의 행위를 방해하지 않고 그냥 나두는 이 사회의 성숙함에
부지중일지라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뿐이지요
주님께서는 나보다 그 누구를 더 사랑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셨다지요?
아내나 남편이나 심지여 부모일지라도..........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과의 관계도 이렇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 주신 우주적인 순리의 궤적을 보여주는
성경 말씀보다 영계의 체험들을 더 사랑하면 될 것인가 싶어요
우상이란 언제든지 온전한 것이 오면 이제껏 자신이 신성시여기며 심지여 하나님처럼 여기던
것조차 미련없이 무너뜨리지 못할 때 자기안에 고착화되는 자아이지요
그게 왜 위험하냐면 자신이 절대적인 주권자가 아님에도 절대자인양 부동적인 신적 자아로 굳혀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이 새계명을 좇아 서로 사랑함에도 주님 사랑하듯 할 수 있겠지만 주님보다 더 사랑하다 보면 치우칠 수 밖에 없는 내 육질의 자연적인 본성을 혹시 거룩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원래 우리 본성은 죽어야 되는 본성이지 살아야 되는 본성이 아닙니다
우린 타고 나기를 진노와 저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내 몸이 기형적으로 태어났고 그 기형적인 것으로 인하여 도무지 순리적인 궤도를
좇아 살 수 없는 몸으로 판정 받았을 때 오히려 그 몸은 주님을 더욱 더 증거할 수 있는 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어느정도면 그렇게까지 창조주로부터 받은 본능의 궤도조차 완전하게 변형시켰을까?
만일 내가 그런 몸으로 태어났다면 나는 어떻해 살아 갈 것인가?
내 몸이 이러하니
내 몸이 원하는 바를 향하여 갈 것인가?
본성이 이끄는 대로
그야말로 알지 못하는 영들에 이끌려 살듯 몸이 원하는 바로 가자니
걸리는 것들이 있어
그 장애물을 치워달라고
그래서
주님과 교회앞에 확증을 갖기 위해
이 우주에
궤적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떼를 쓸 것인가?
아니면 주신
십자가의 궤적에 내 정과 육을 날마다 죽이며 말씀대로 살아갈 것인가?
그렇게 자기를 진솔하게 설명해 주는 한 영혼의 소원을 놓고
내가 어찌 해 줄 수 없는 나의 한계성에
오늘
본문속에 울고 있는 요셉곁에서 나도 울고 싶어요
그리고
그 영혼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친구여!
미안하이
왜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천형의 몸을 주어 날마다 고뇌의 십자가를 지게 하는지...
왜 하필이면 친구가 그 사람곁에서 그 짐을 지고 소외란 그늘 속에 살아야만 하는지...
오늘 요셉이 형제들의 심연속에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었던 지난 날의 과오로 인한 죄책감을
아버지 죽음 이후 가장 먼저 잇슈로 등장시키는 형제들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묵상하다보니
실로 우리가 살려 내야하는 본질은 주님이시지 결코 내가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아침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있느냐는 말은 사람 사는 세상에 만들어진 역사 앞에서 심지여 교회안에서조차 만날 수 밖에 없는 난해한 사건들 앞에 하나님을 초청하여 다시한번 화해와 연합이란 구심점을 회복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리고 요셉이 그 형들의 자식들까지 양육시키겠노라고 약속한 것처럼 그 잇슈의 당사자들을
주님 말씀으로 여전히 양육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다시한번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낍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깊은 자각의 눈물을 흘린 자는 이 세대의 거센 잇슈들 앞에서도 주님 말씀을 변형시키지 않고 가감없이 증거하는 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