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수요일
제목: 내니
요한복음 6:16-29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오늘은 음력 12월 5일, 엄마의 생신이다. 가족들은 지난 주 토욜에 모여 점심을 먹었고 오늘 미역국을 먹었냐는 안부 전화에 엄마는 고마워하신다. 그러면서, 딸이 하나도 없었으면 어쨌을까? 하시며 당신은 딸 하나를 낳았지만 열 딸 낳은 대접을 받아 고통스러웠노라고 지나가는 말씀으로 흘리신다.
우리 집은 아빠가 첫 째이고 남동생 둘이 더 있었지만 유아 때 잃고 고모가 그 밑으로 넷이다. 아들, 딸, 딸, 딸, 딸 그리고 내가 첫 손녀로 태어났다. 내 밑으로 남동생이 둘! 큰 애가 아들이고 그 밑에 딸이었으면 달랐을 거라는 엄마의 말이 여운으로 남는다. 내가 듣지 못한 내 출생의 비밀이 있었던 거다. 엄마가 그동안 지나가는 말로 할아버지, 할머니는 서운해는 하셨지만 아빠도 엄마도 첫 딸이어서 좋았다고만 말씀하셨지 오늘 같은 표현의 고통스러웠다는 말은 처음이다. 그냥 내 생각에 고모들이 넷이나 있는 중에 손녀라 집안에서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니었겠구나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 사실을 들은 거다. 그 말을 들으니 내 두려움의 근원이 보이는 것 같다.
나는 내 안전의 위협에, 내가 죽을까 봐 벌벌 떠는 게 있다. 놀이 기구는 말할 것도 없고 주사 맞기도 싫고 나를 아프게 하는 건 그게 뭐든 기겁을 한다. 나의 무의식 가운데 자리잡은, 의식에는 없는 세상이 나를 향해 보여준 나에 대한 거절감... 내 생명에 대한 위험으로까지 느껴졌었던 것 같다.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새로운 통찰이다.
예수님이 다시 혼자 산으로 가셨다는 어제 본문의 끝자락을 다시 읽으며 내 외로움의 근원지에는 우리 예수님도 함께 라는 위로를 얻는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외로움...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탄다. 감정의 기복을 타며, 외로움이라는 바닥의 감정이 반복되는 패턴이 익숙하다. 그 외로움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게 위로였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상 끝날 까지 함께하신다는 그 말씀이 너무나 감사했고 너무나 큰 위로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다시 혼자 산으로 가셨다.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을 떠나 아버지와의 교제를 위한 분리이셨겠지만... 예수님의 고독감이 공감된다.
제자들에게 예수님도 없이 큰 바람과 파도, 어둠 가운데 노를 저으며 지치고 힘든 가운데 찾아온 또 하나의 두려움... 바다 위를 걷는 이를 통해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내니, 두려워 말라” 내니.... 예수님이라는 그 말씀에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한다. 배는 곧 가려던 가버나움에 도착한다. 내니.... 하는 음성에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식하고 영접한 순간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 큰 바람과 파도, 애쓰고 또 애쓰고 힘쓰며 노를 젓고 또 젓고 이제 지쳐가는 가운데 내니... 하는 음성에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차리고 함께하는 순간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바다 가운데에서 이제. 가고자 했던 가버나움에 곧 도착한다.
내니, 두려워 말라. 정서의 뿌리, 바닥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외로움의 끝에도... 나는 겁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해결되지 않은 두려움이 많았다. 특히, 나의 안전에 관한 내 생명에 관한 두려움... 내가 죽을까 하는 두려움.... 내가 이 땅에 오기 전부터 나는 두려웠는지 모른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있는 이 땅으로 나오기 싫었는지 모른다. 나를 거절할 세상에 대한 두려움, 내가 죽을 것 같은 두려움... 그러고 보면 나는 내가 딸로서 의식에서 차별받은 기억은 없다. 다만, 가족 소개를 할 때 내 밑으로 남동생 둘이라는 말을 할라치면 자랑스러움이 저절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부분의 어른들은 남동생 둘이라는 말에 잘 했네~ 라는 찬사를 했다. 남동생에 대한 말을 듣고 나를 바라볼 때의 눈빛은 그 전과 달랐다. 안심의 눈이기도 하고, 부러움의 눈이 되기도 하고, 흐뭇해하셨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들들을 임신했을 때도 나는 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했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의 무의식 가운데 딸을 거부하고 아들을 인정하는 게 있었던 거다. 남편이 사형제라는 말에도 끌렸던 것 같고.... 내 안에서 딸보다는 아들을 좋아했던 거다.
내가 딸이었기 때문에 받는 엄마의 고통이 내게도 전달이 되었겠지, 할아버지, 할머니 주위의 실망감이 무겁게 내 무의식 가운데 감지가 되었었겠지. 그래서 나는 애썼는지도 모른다. 제자들이 죽을까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며 노를 젓듯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애썼다. 동생이 태어남과 동시에 엄마, 아빠를 일찍 떠나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사 온 이후로 나는 엄마, 아빠를 떠나 할아버지, 할머니와 기거했다. 그 때가 세 살 때다. 그런데도 한 번도 엄마를 찾아 울며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울 나들이를 하러 갈 때도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좇았다. 그 때는 내가 왜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랐을까 그렇게 좋았을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살고 싶어서였다. 나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나의 애씀이었다. 엄마를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은 어린 아이의 배려였다.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엄마는 고통스럽지 않을 테니까....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엄마, 아빠보다 더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엄마, 아빠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니까. 나는 나의 욕구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걸 좇은 거다.
엄마는 내가 일하는 걸 싫어하셨지만, 나는 할머니를 좇아 밭에도 가고 풀도 뽑고 고구마도 캤다. 나는 그게 즐거웠다. 힘들게 일하는 할머니를 돕고 싶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러면 할머니께 듣는 칭찬과 인정 그것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좇아다녔다. 지금도 내 손은 거칠다. 고구마를 무겁게 머리에 이고 집에 자랑스럽게 들어오는 나를 보고 엄마는 막 혼내셨다. 그러면 키 안 큰다고... 막 혼내셨다. 나는 엄마에게도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의아했다. 왜 화를 내는지 몰랐다. 나는 엄마의 행동이 별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엄마가 이해가 된다. 나라도 엄마처럼 그랬을 것 같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에게 일을 부리는 할머니가 야속했을 것 같다.
죽을까, 두려웠던 나! 세상의 거절감 엄마의 고통까지 무겁게 전해지는 세상의 홀대, 거기서 느껴지는 위협에 두려워하는 내게,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 살아날 수 있음에 애쓰고 있는 내게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 찾아오셨다. 나의 의식에서는 나도 모르는 나의 두려움을 먼저 아시고 내니... 두려워 말라 찾아오셨다. 내니.... 예수님이니... 그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 감사하다. 내 안에 또 다른 어린 아이, 두려움에 떨며 애쓰는 아이, 사랑하는 엄마, 아빠를 위해 내 사랑을 내려놓고 두 번째 사랑을 선택한 애어른 같은 아이, 내가 할 하나님의 일은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의 일이다. 그 예수님을 믿고 누리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의 일이다. 내 사랑을 내려놓지 않고 그 사랑을 선택하며 누리는 것, 그 분을 위해 애쓰며 내가 할 일이 뭘까 분주할 게 아니라 믿고 누리는 것, 그게 하나님의 일이다.
♡ 하나님, 사랑해요. 예수님, 사랑해요. 날마다 고백하겠습니다. 찾아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신 주님을 믿고 누리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