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일 수요일
제목: 예배하는 자
요한복음 4: 15-26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배.... 참으로 드리고 싶다. 예배를 사모한다. 사마리아 여인 역시 예배를 드리고 싶어한다. 예배를 드리고 싶지만 나는 어떻게 드리는 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건지 서투르기만 하다. 다른 곳에 마음이 팔려 늑장부리다가 예배시간에 늦기도 하고, 헐레벌떡 달려왔지만 예배 시간에 늦을 때도 있고, 여유있게 왔지만 그러나 앉아서 피곤함에 졸기도 하고, 말씀을 듣고 옳구나! 그렇구나! 싶지만 일상에서 달라진 건 없는 껍데기와 허울만 있고.... 삶의 변화를 좇지만 변화는 기적이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 성령과 말씀으로 드리는 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말씀에 비춰보면 나의 죄와 악만 드러난다. 성령에 비춰보면 나의 부족함만 보인다. 내가 무엇이관대.... 내가 무엇이관대...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난다. 나에게 듣고 싶으신 사랑 고백, 나의 입술로 나의 목소리로 듣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 나를 통해 듣고 싶으시다는 하나님을 향한 진한 사랑 고백, 나의 삶으로 드리는 순종과 적용이라면 하나님의 기쁨은 더할나위 없겠지....
예수님을 뵈었던 그 당시 사람들을 부러워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알겠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이 드러난 성경 말씀, 완성된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친히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할 수 있다. 그렇게 보여주심에 볼 수 있는 지금, 게다가 말씀을 볼 때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어떻게 순종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혼란의 시기를 넘어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는 우리들교회에 속해 말씀 양육을 받을 수 있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
나는 교만하다. 말씀을 선포하시는 목사님들을 차별한다. 같은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전하는 분에 따라 이 말씀은 아닌 것 같고, 저 말씀은 옳은 것 같고 늘 판단의 잣대를 들이밀었다. 그게 예배 시간이었음에도 답답함을 느끼는 나의 기준에 거슬러지만 귀를 막고 판단했다. 그건 나의 의지가 아닌 짧지 않은 세월 고착이 되어 자동화가 되어버린 나의 미성숙함이다. 어느 교회에서고 나의 답답함에 대한 해갈이 어려웠다. 여름, 겨울이면 성서 유니온에서 열리는 수련회에 들이밀고 때마다 열리는 성경 공부에 그게 어디든 달려가는 열심만큼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배척의 힘도 컸다.
사마리아 여인의 심정이 느껴진다. 나의 죄와 악, 수치! 모두 다 드러나지만 그러나 느꼈을 그 시원함, 나도 그게 필요했다. 내가 안 되는 건 알겠지만 말씀으로 책망받고 교훈받고 지적받고... 나의 안 됨에 대해 애통해하며 옷을 찢는 회개, 비록 생채기에 피가 나올 망정, 나의 가증함과 수치가 드러날 망정, 그게 말씀 앞에 오롯이 서야 하는 필수 과정이기에 나는 말씀으로 책망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뤄졌다. 예배를 통해 내 죄를 본다. 성령과 말씀을 통해 내 악과 죄만 보인다.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고 나만 보인다. 애통하고 회개해야 할 나의 가증함과 음란이 보인다. 여전히 나는 죄 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나는 가증함으로 수치를 감추고 있지만 한꺼풀 한꺼풀 공동체를 통해, 지체들을 통해 나를 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이 것이 천국이다. 내가 누리는 천국이다. 내가 누리는 예배의 회복이다.
아버지가 오늘 나를 찾으시는 예배의 장소, 나의 숨쉬는 이 곳, 숨결 가운데, 성령 하나님이 계신 몸된 나의 성전 가운데.. 지금 이 곳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 지금 이 곳에서 하나님을 사모한다. 나의 주님!! 주님 앞에 서면 빛 가운데 생명 가운데 나의 악과 어두움이 드러나지만 또 한편 나의 두려움과 불안함도 사라진다. 용기가 생긴다. 그게 힘이 된다. 나는 오늘도 예배하는 자로 서고 싶다. 오롯이 말씀 앞에 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