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8일 금요일
제목: 보이시며
시편 148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 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질문
1. 내가 마땅히 여기고 있음은 무엇인가?
묵상
내가 할 마땅한 찬양! 할렐루야! 카톡방에서 계시록이 끝남에 대한 섭섭함을 말씀하시는 집사님, 그러고 보니 나도 서운하다. 계시록 말씀에 취해서 주일 예배와 또 12월 큐티 본문으로 함께했던 시간들... 또 내가 편하기 위한 섬김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섬김이 되게 해달라는 집사님의 기도에 아하~ 나도 그랬구나! 싶다. 내 마음이 편하려고, 또 그렇게라도 해야 예수님의 ‘예’자를 꺼내기가 부드러워지니까.... 그런 마음들이 먼저일 때가 있었다.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 수단이 섬김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었던 나의 악이 보인다. 내 마음, 내가 편하기 위한 섬김을 빼고 나면 남아있는 게 있을까? 하나님이 매어주신 공동체에서 나를 보게 하시니 감사하다.
미루고 미루다, 회의 당일 날 황급하게 뛴다. 회의 자료가 준비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조급한 마음이 진정이 안 된다. 똥줄이 탄다. 후유~ 끝났다. 시간 안에는 마쳤다. 흐흐~ 얼마 만에 먹어보는 멍게! 난 멍게향이 좋더라. 입안에 씹히는 두툼한 숭어와 우럭! 맛나다. 진수성찬 점심에 배는 빵빵~오후 연수에 참석하기 싫은 악이 올라온다. 내가 찾아가는 연수가 아니라 할당이 되어 동원되었다는 게, 나는 내가 하는 건 즐겁지만 누군가 시켜서 해야 하는 일이 되면 퍽 싫어하는 것 같다. 내가 보고 찾아서 하는 건 즐거운데... 나의 선택권과 자율권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는 건, 나의 채워지지 않은 상처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내 자율권을 많이 인정해주셨던 것 같다. 내 기억에 할아버지가 편찮으셨을 때, 돌아가시기 바로 전이었을 거다. 시험도 끝난 겨울 방학, 친구들과 맨 처음 기획한 우리들만의 기차 여행을 가고 싶어서 안달복달했었는데....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안 된다는 아빠 말에 얼마나 섭섭하고 낙심이 되었는지... 그 때는 나를 못가게 하는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친구들이랑 김밥을 싸서 가져가고 싶어서 준비한 그 시금치로 할아버지는 된장죽을 끓여서 맛있게 드셨다. 거기에 내 덕분에 잘 먹었다는 인사까지... 나는 여행 못가게 된 것에만 집착하여 마음속으로 툴툴거리고 있을 때, 할아버지의 인사로 비로소, 내가 참 못됐구나 깨달으며 죄송함이 들게 했다. 아픈 할아버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거다.
엄마, 아빠로부터 제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할아버지는 강압적인 데가 있었다. 남동생이 내게 참 못되게 굴었는데, 새 교과서를 받고 내 책만 달력으로 싸고 남동생 것은 안 싸줬는데 그것 땜에 혼나고 억지로 남동생 교과서를 싸줬던 기억이 난다. 진짜, 진짜, 진짜... 책 싸주기 싫었는데... 흥! 내가 왜 그놈 것을 싸줘야 하냐구!! 엄마는 내가 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제지의 기억이 없지만, 내가 선택을 하도록 배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옷을 사오는 건 엄마였다. 내가 가도 엄마가 이것 저것 입혀보고 엄마가 보기에 예쁘면 그게 내옷이었다. 거기에 대해 별 감각이 없었던 것 같다. 말 잘 듣고 착하고 까탈스럽지 않은 퍽 순응적이었던 아이였다. 거기에 대한 불평도 없었지만, 어느 날 보니까 내가 내 옷조차 잘 고르지 못하더라. 선택을 참 어려워하고 잘 못하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도 옷을 고를 때, 가게 점원에게 조언을 구하지 내가 척척 고르지 못한다. 그리고 감각이 퍽 떨어져 옷도 잘 못산다. 그러나 엄마는 다른 부분에서는 내 자율권을 인정해주시고 나보고 잘 알아서 하라고 내가 하는 선택에 대해 존중해주셨다. 내가 처음에 교회에 가는 것 역시 엄마는 존중해주셨다.
그래서 내게 선택은 존중을 뜻한다. 선택하지 않게 하고 강압적이면 그건 나를 존중하지 않는 걸로 해석된다. 그게 어머님과의 부딪힘인 것 같다. 평생을 선택하게 하시기보다 당신 뜻대로 고집스럽게 좌지우지하셨던 어머님의 스타일은 나와 사소한 것에서부터 부딪혔다. 나는 사용할 그릇은 꺼내놓아야 하는데, 어머님은 설거지가 끝나면 저 안쪽에 들여다 놨다가 매 끼니때마다 또 꺼내야 하는 수고를 자처하셨다. 옛날 옛날, 부엌에서 불 때며 밥해먹던 시절, 그릇에 그을음이 묻을까 그때는 필요했을까? 우리 할머니를 보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 엄마의 부딪힘도 그랬었다. 엄마가 그릇을 쓰려고 보면 어디에다 할머니가 넣어놨는지 없 는거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불편해했었는데, 그런 어머니를 만난 후 엄마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최고시다. 그런 나의 상처들을 끌어안고 덮어주실 만한, 너무나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은 너무나 달콤하고 멋졌다. 나의 수준이 안 되어서 그런지 예수님은 항상 내게 물으셨다. 하나님께 내가 묻는 것보다 예수님이 내게 묻는 게 더 많으셨다. “어떻게 할래?” 그리고 내가 준비될 때까지 항상 기다려주셨다. “나,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 “그래~ 괜찮아. 내가 기다릴게. ” 성경 어디에서고 내게는 그렇게 선택을 존중해주시는 예수님만 보였다. 이제는 내가 묻는 게 늘어났다. 내가 예수님보다 항상 말이 더 많았는데, 이제는 묻고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우리들 교회에 붙어있어서 주신 약간의 변화고 성장이다.
큐티 노트를 보며 내가 감동했다. 서툴지만 비록, 흉내지만 그래도 낯설게 걸어갔던 작은 걸음들, 인내하지 못하고 팔딱거리고 쉽게 그치는 나의 옛습성이 지금도 살아있지만 중단했다가 다시, 또 다시 또 그렇게 시작하고 시도한 인내의 몸부림이 보이기 때문이다.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언제나 함께하셨음에 그게 감동이었다. 여기까지 친히 인도하신 하나님의 숨결, 손길, 발자욱들... 그게 보인다. 그 사랑에 감격한다. 내가 얼마나 알겠는가? 내가 얼마큼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하겠는가? 그럼에도 내 수준에서지만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이 어둡고 막힌 것을 뚫고 보이시고 들려주시는 것에 감사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찬송한다. 여기저기, 마음의 여유를 갖고 둘러보니 모두가 은혜다. 목사님의 창세기 말씀을 훑고 있는 이 시간 자체가 천국이고, 다시 보는 터키 순교 동영상, 또 김용의 선교사, 이용규 선교사님의 말씀들을 통해 다시 나를 흔들어 진동시키는 하나님의 사랑,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 고백은 마땅한 나의 고백이다.
그런데 내 여정 가운데 또 마땅히 여기는 건 존중이었다. 존중하지 않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다. 내가 폭발하고 요동하고 흔들릴 때면 어김없이 존중 문제였다. 존중이 확보가 안 되면 섭섭하고 섭섭해도 너~무 섭섭하고, 그러니까 화도 나고... 그건 나의 뿌리 깊은 상처였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여전히, 나의 그 가치는 소중하고 귀하다. 그 중심에는 내가 있다. 나, 나, 나! 내가 살아있다. 죽지 못한 내가 있다. 지금은 여기까지다. 죽게 하실 예수님, 나와 함께 골고다 언덕도 가실 거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거고... 나는 아직도 겉사람만 십자가에서 죽었지, 저 안 깊이에 내가 살고 있다. 내가 죽을까 봐, 부들부들 떨고 있다. 예수님이 보시고도 못 보신 척 먼저 말씀을 안 하시니까 나도 모르는 척 딴청이다. 그러면서 사건마다 내가 보기에 나를 홀대하는 상대는 못 참고 부르르, 요동한다.
“예수님, 나를 죽여주세요~”
예수님은 이걸 기다리신 지도 모른다. 못 죽는 나를 발견하고 죽여달라는 기도를 할 때까지.... 참 오래도 기다리셨다. 참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다.
꿈이다. 흰색 기저귀, 손수건, 마당 빨래줄에 한 가득이다. 시은이 거다. 흰색 목련,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는 것 같다. 아름답다. 깔끔쟁이 막내 고모의 작품이다. 고모는 기저귀가 접히는 게 싫어서 접지도 않았다. 하나 하나 집게로 달기가 힘들었겠다. 정성이다. 손도 재다. 고모니까 가능하다. 인섭인지 옥선인지가 결혼을 하는데 사진첩을 폈다. 영훈이 결혼 사진도 보인다. 영훈이 할머니가 밀가루로 부드러운 인형을 만들어 선물하셨다. 솜씨도 좋으시다. 정성껏 모든 식구수대로 만들어 주신 인형이 감동이다. 그리고 참 부럽다. 부드러운 감촉이 참 좋다. 햇살이 참 곱다. 마당이 빛난다. 시은이... 은혜의 시작이다.
적용
1. 감사와 찬양
① 하나님, 나의 죽지 못한 저 밑, 깊숙한 곳에 살아있는 나를 만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② 내가 죽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것 역시 할 수 없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죽여 달라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 나를 죽여주세요~ 내가 혼자는 죽을 수도 없는 나약함을 아시니, 함께해주셔서 밟으면 밟히겠습니다. 함께해주시기에 마땅히 내가 들어야 할 소리로 알고 듣겠습니다. 함께해주시기에 마땅히 내가 봐야 할 것으로 알고 직면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