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 토요일
제목: 참과 의
요한계시록 16:1-9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질문
1. 나는 무엇을 듣고 있는가?
묵상
또 보매, 또 보니, 내가 보니, 또 내가 들으니, 내가 들으니... 요한은 보고 듣고 보고 듣고, 요한은 잘도 보고 잘도 듣는다.
어제 문득, 남편과 부부목장을 가면서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이끄신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뭉클하고 벅차 감격스러웠다. 웬 은혜인가? 하나님을 몰라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불러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영접케 하셨다. 성경 공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시고, 교회에 정착케 하시고, 경배와 찬양 목요 찬양 집회에서 가슴으로 만나게 하시고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보듬어주시고 양육시켜주셨다. 때때로 귀한 목사님들의 책과 테잎을 통해 말씀으로 채워주시고, 기도의 문이 열리게 하셔서 기도의 맛을 보게 하셨다. 때마다 시마다 나에게 가장 적합한 만남을 허락하시고 양육시켜주신 우리 아버지, 육의 아빠는 바쁜 아빠였고 육의 엄마는 바쁜 엄마였지만, 나의 친 아버지, 하나님 아빠는 나만 바라보시고 나만 주목하시고 나 하나만 사랑하듯, 온전히 나만 바라보시는 가장 좋은 아빠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에 감사하고 감사한다. 웬 은혜인가? 나의 자격이 아니었음을 알기에 더욱 더욱 더욱 감사할 뿐이다.
예수님의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멋진 분임을 척 알아봤다. 세상에! 나는 알지도 못하는 그 분이 나를 위해 나를 사랑해서 죽으셨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이고 감사였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용납이 안 되었다. 아니, 그냥 죄를 사하실 수도 있는 권한이 있으신 분이 당신 아들을 죽이면서까지도 원칙을 고수하는 게 쫀쫀해보이고 옹졸해보이고 융통성은 하나도 없는 감정조차 메마른 분으로 여겨졌다. 아버지 잘못 만나 죽어야만 했던 예수님만이 가련했다. 예수님만 사랑할래요~ 하나님은 아니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사소한 복수, 마음의 삐짐에 대한 표현, 그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데 그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했던 하나님, 그럼에도 그 예수님처럼 사랑한 나를 위해 당신의 가장 귀한 아들을 내놓았던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지면서 무릎이 꿇어졌다.
내가 얼마나 옹졸한 사람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깊이 없는 사람이었던가. 나의 죄와 악이 보였다. 그렇게 시작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랑, 우리 아빠와의 사랑! 하나님은 한 번도 삐쭉빼죽 요동함이 없으셨지만 나는 오르락내리락 늘 좋아요~ 너무 좋아요~ 그러다가도 어쩌면 그러실 수가 있어요? 하고 또 달려들고 반항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 꾸준함이 얼마나 나에게 안정감을 주고 안심하게 했던지..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셨다. 나는 그 분의 자녀라고 하면서 가끔씩 찔리는 것이 어쩌면 그리도 다르게 변덕이 심한지, 전혀 닮지 않은 나의 성품! 그게 찔리면서도 그게 내 탓인가요?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책임이지요! 하고 되레 큰소리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넉넉하게 나를 안아주시고 품어주시고 달려와주시고, 감싸주시고 채워주시고, 위로해주시고! 그게 우리 아버지다. 우리 아빠다.
내 심정만 토로하며 투정하던 시절이 좀 지나고 조금씩 하나님의 심정, 아버지의 마음이 보이고 느껴진다. 아픈 아빠의 마음, 상심한 아빠의 마음, 실망하고 낙심하고, 슬퍼하고 화난 아빠, 그럼에도 여전히 변함없으신 큰 줄기의 사랑하심!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변함없는 신뢰하심! 여전히 나는 신뢰할 수 없는 천방지축의 변덕쟁이이지만, 내 안에서 지금까지 동행하셨던 가장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신뢰할만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보증해주시니 그런 사람이다. 아! 하나님! 참으로 감사하다.
찬양으로 위로주시고 찬양하게 하시는 시절을 지나, 기도의 시절을 주셨고 또 다른 영역의 경험... 그리고 말씀을 공급받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지금의 시절을 만들어주신 것도 주님이시다. 하나님 말씀이 정말 잘 안 들려 애달팠던 시절, “하나님, 제가 들을 수 있는 크기로 말씀해주세요~ 너무 큰 소리로 말씀하셔서 내가 들을 수 없다면 좀 더 작게, 너무 작은 소리로 말씀하셔서 내가 둔해 못 듣는다면 좀 더 크게, 한 번 해서 못 알아들으면 알아들을 때까지, 듣고도 적용 못 하면 적용하고 순종할 때까지.. 하나님, 내게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세요~”하고 간구했었다. 그 기도가 지금 응답받은 것 같은 만족감에 충만하고 감사하다. 하나님은 한 번도 내 기도를 흘려들으신 적이 없으시다. 언제나 가장 적합한 그 때에 표현해주시고 응답해주셨다. 내가 준비가 안 되었다면 내가 준비가 될 때까지 그렇게 기다려서라도 응답해주셨다. 그게 우리 아버지다. 그게 우리 아빠다. 자랑스러운 우리 아빠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아빠다. 그 사랑에 목이 메인다.
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나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다. 나의 뿌리는 말씀이다. 진보측 얘기도 보수측 얘기도 비슷하기는 하지만 다르다. 결국 666 짐승의 숫자고 짐승의 가치관이기에 성경적 가치관, 예수 그리스도적인 가치관이 될 수 없다. 혈액형으로 사람을 분별하며 무슨 형이냐고 물을 때, 나는 예수피!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진보냐 보수냐에서의 질문에는 나는 진보다라고 말했던 나의 한계가 보인다. 모양새로는 진보측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내 안에는 진보와도 보수와도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예수가 있다. 아직, 모두 예수화가 되지 않은 나의 한계는 있지만 나의 근간은 예수 그리스도고 성경이다. 아직도 밀알 적용으로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죽지 못하여 이한 낫을 갖고 있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지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의 분별은 할 수 있다. 예수가 참이고 예수가 의다. 예수의 심판이 참이고 의이다.
또 상처다. 꽉 막혔다. 간극이 너무나 크다. 골이 깊다. 평가에 대한 방향을 의논하지만, 아직도 토의, 논의에 익숙치 않은 문화다.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고 그 입장을 좁혀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싫은 거다. 왜 그게 문제화가 되어 길게 회의가 진행되는지 그조차 짜증이 나고 지루하고 번거로운 거다. 갈등은 피해야만 하고 갈등이란 게 없어야 되는 거다. 왜? 나는 그게 이상하다. 누군가 내게 마인드가 무척 혁신적이고 열려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면에서는 보수적이라고 생각해서 그 피드백도 의아했다. 그런데 장이 열리고 보니까 그런 것 같다. 그 말에 동의가 된다. 속에 부글거리는 갈등의 요소는 회칠한 무덤처럼 덮어만 놓고 빨리 끝내고 화기애애를 가장하고 싶은 악이 보인다. 좀 의견이 달라 목소리가 커지면 안 되는가? 의견의 차이가 커서 길게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깊은 속내까지 얘기하면 안 되는가? 설문지로 받았기 때문에 그게 근거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이 자리는 피하고 싶다는 게 어찌 민주적인 의사 소통 구조일까? 나는 공동체에 대한 꿈이 있다. 내가 일하는 일터에서도 공동체가 있어서 논의하고 만들어가면 좋겠다는 꿈이 있다. 그런데 어렵다. 그냥 끼리끼리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끼리만 모이게 된다. 한 언어가 어렵다. 내가 있는 이 곳이 예수님을 흉내라도 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꿈꾸는 것 자체가 음란이었던 건가? 말씀이 없이는 비슷한 모양만 흉내 내기가 될 뿐이다.
적용
1. 감사와 찬양
① 하나님,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시고 양육시켜 주시면서, 가장 좋은 것으로만 가장 적기에 들려주시고 채워주시고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② 요한처럼 참되시고 의로운신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듣고 보는 인생되도록 훈련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③ 건강하고 귀한 공동체에 속해 듣게 하시는 은혜, 감사합니다.
2. 하나님, 내가 드리는 기도에 늘 응답하셨는데 이제 주님의 심정을 읽고 아버니를 헤아리는 성숙함, 이타적인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3. 남편 섬김, 자녀 양육,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때, 잘 듣고 적용하게 하소서
4. 토요일, 부부 목장을 핑계로 낮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겠습니다.
5, 내가 있는 곳이, 원래부터 하나 일 수 없는 구조를 알고, 방향을 잡을 때 하나님 주신 지혜로 오직 그리스도가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