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토요일
제목: 오라
요한계시록 6:1-17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질문
1. 하나님이 주신 환경에 오라~ 하는 담대함과 순종함이 있는가?
묵상
혁신 연구회 1박 2일 MT, 특강 강사로 오시는 분의 명성이 자자하다. 어렵게 잡은 것이기도 하고 내년도 계획에 솔깃하기도, 게다가 연구회 소속 사람들이 많이 못 간다. 처음엔 목장 예배가 먼저라 생각했지만... 부담감과 아쉬움, 미안함, 안타까움.. 갈등이 된다. 선택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는 하지만 원칙에 있어 흔들린다. 남편에게 중간에라도 참석하고 늦게 목장 예배는 어떨까 하는 제안이 내 나름, 하나님이 주신 지혜인가 싶어 제안했는데, 남편은 오히려 반긴다. 갈등하지 말고 그냥 그 연수에 가란다. 그 말에 더 갈등이다. 내가 바라는 대답은 내가 못 가더라도 혼자서라도 가겠다 이지만, 남편은 여전히 시간을 빼야 하는 부담감에 자신의 일처리가 자꾸 미뤄지는 게 십자가다.
어제 말씀, 어린양, 자기 희생을 되뇌었다. 귤을 주문했는데, 시간 안에 못 갔다주는 것에 삐져서 직접 가서 들고 오면서 마음 속으로 다시는 이용하지 않겠어! 매주 가는 좋은 고객 하나 놓친 걸 알까? 하는 악을 품었는데 자기 희생을 되뇌이다보니 그럴 수도 있지~ 빨리 나가야 하는 건 내 사정이었고, 그게 아니었으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을 상황이었음에 대한 객관화가 되었다. 그래, 내가 좀 불편해도 참아지는 것 그게 자기 희생이지 싶은 마음에 올라왔던 독기가 자연스럽게 녹아졌다.
시험지 채점에 대한 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마음이 상했다. 들이대는 게 신경쓰이시니까~ 라는 말에 내가 건드려졌다. 회의는 마무리가 되었지만, 속상한 마음에 울컥하며 눈물이 났다. 뭐가 건드려졌을까 되돌아보는데, 한 편에서 내가 상대에 대한 원망이나 독기, 악보다는 내 안, 내면을 탐색하는 성장한 모습의 내가 만나져서 기뻤다. 보통 그런 상황이면 나 혼자, 단절을 외치고 거리두기를 하는 게 꽁한 내 맘이 풀릴 때까지 내가 하는 사소한 복수다. 내가 조금은 성장했구나 싶은 기쁨! 그렇지만 울적한 마음은 있다. 안전한 곳, 편안한 곳에 대고 내 속풀이를 좀 하면서 울었더니 시원하다. 나에게 눈물은 또 하나의 중독이다. 똥을 눈듯 시원하다. 남편에게도 한 마디, ‘나 울적해’ 했는데 기대했던 것처럼 별 반응이 없다. 그런데 아직, 남편에게는 내 속이 넓어지지 못했다. 서운하고 섭섭해서 말을 안 하고 꽁~ 한데, 심지어 목장 예배 갈 거야? 하는 말에 폭발했다. 아니, 목장 예배 간다고 연수도 안 간 적용을 한 사람에게 목장 예배 갈 거냐고 하는 말을 할 수 있냐고! 윗질서에 대한 순종은 회개할 나의 악이고, 아직도 먼 내 적용거리다.
대부분의 선택은 기쁘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다. 내가 감당할 만한 것만 선택한다. 희생이 없다. 예배의 선택도 교회의 선택도 목장의 선택도... 내가 좋아서, 기뻐서, 즐거워서다. 힘들지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기에 제가 순종합니다! 그게 없다. 여전히 선택의 중심에는 나! 나의 안위와 나의 기쁨, 나의 즐거움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그 어떤 것에도 요동한다. 피곤하면 자야 하고,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힘들면 쉬어야 하고, 기분 나쁘면 나쁘다고 말해야 하고 표현해야 하고. 그게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안전한 곳, 따뜻한 곳을 찾는다. 그게 제재 받거나 내 뜻이 아닌 상대에 의해 되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그럴 수도 있지~ 가 안 되고 못 참는다. 내가 어떤 환경에든 우레같은 소리로 오라~ ! 참고 인내하리라. 그 십자가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니 내가 붙좇으리라는 담대함이 없다.
여전히 나는 무섭고 두렵다. 내가 살아있으니, 내가 죽을까 두렵고 내가 다칠까 두렵고 내가 힘들까, 내가 아플까, 내가 상처받을까 두렵다. 그렇기에 환경에 전폭적인 순종이 안 되고 왜 나를 건드리는데? 하며 부들거림과 요동함이 있다. 이기고 또 이기려는 정복자, 화평을 제해짐, 기근, 사망, 신원받지 못함, 우주적 심판! 그 날에 설 자가 누구리요 하시는 말씀에 하나님도 내 사정을 아시는구나 싶어 위로가 된다. 역시 결론은 예수님만이 피할 길, 가장 안전한 산성이시다. 그렇기에 그것에 대한 확신함, 믿음이 있다면 무섭고 두려울 일이 없을 텐데도 내 믿음 없음에 대한 근거, 나의 두려움증과 무서움증이다. 심지어, 놀이기구도 무섭다. 그 근원은 내가 죽을까 싶은 안전에 대한 두려움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새로운 환경, 낯선 환경이 어색하고 좀 불편하다. 어제도 목장 예배인데 연합예배였다. 떠들썩함, 시끄러움... 분위기가 달라진 것에 약간의 불편감이 있었다. 지경이 넓어지고 확장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어딘지 우리끼리의 오붓함이 없어진 것 같다. 아~ 나의 그런 경향성이 보인다. 공동체를 강조하다보니 수용력이 떨어지는 거다. 편안함 익숙함에 사로잡혀 끼리끼리, 우리끼리가 더 편하고 더 좋은 거다. 내가 미처 못 봤던 내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내 환경이 그러긴 했다. 씨족 사회같은 최가들이 모여사는 작은 동네에서 지금도 우리 부모님은 살고 계시다. 가끔 외지에서 이사오시는 분이 있었지만, 종가 행사들 가운데 좀 소외시키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있지 않았나 싶다. 새로운 사람과의 낯가림이 나에게도 여전히 있다. 우리 교회가 6개월만에 한 번씩 목장 개편을 하는 이유를 내 안의 악에서 찾았다.
오라~ 담대함으로 외치며 하나님이 주시는 내 환경에 순종하기를....
적용
1. 감사와 찬양
① 하나님, 늦은 시간이지만, 말씀을 통해 음성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② 우레같은 소리로 오라~ 담대함으로 외칠 수 있는 이유가 능히 설 수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확신 때문에 가능함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③ 내 속에 숨겨진 악, 편안함 속에 숨겨진 편협성, 나의 안위, 믿음 없음을 또 보게 하시고 여전히 윗질서에 순종하지 못하는 나의 바닥을 보게 하셔서 회개할 마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2. 하나님 주신 환경에 오라! 담대함으로 외치며 예수 그리스도만 의뢰하기를 기도합니다.
3. 남편 섬김과 자녀 양육, 맡겨진 역할에 지혜 주시고 내가 만나는 나의 한계를 통해 주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악과 죄, 음란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