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토요일
제목: 인생
이사야 9:1-7
요약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흑암에 행하던 자,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즐거움을 더하게 하셔서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게 되리라. 한 아기를 주셔서 어깨에는 정사를,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공평과 정의로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질문
1. 멸시를 당하게 하시는 것도 영화롭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심을, 주님의 주권임을 고백하는가?
2. 흑암에 행하고 사망 중에 있는 자에게 빛이 비췸에 즐거워하는가?
3. 내게 오신 예수님, 내 안에서 이루실 일들을 바라보는가?
묵상
우리 동네에서도 교회 가는 사람이 두 세집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분들은 대부분 외지에서 오신 분들이었다. 우리 동네는 씨족 사회 같이 아주 작은 공동체였다. 대부분 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유씨 집안도 있었고 외지에서 오신 분들이 그 중 서 너집 있었다. 외지에서 오신 분들이 믿는 예수님은 우리 동네의 유지들에게 별 영향력이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 유교집안에 미신까지 혼합되어 우상을 섬기는 동네였다.
예수님, 가장 먼저 기억은 초2때 심장병을 앓던 친구에게서 들은 간증이다. 내 기억에 전정순 이라는 친구였는데.. 심장병을 고쳐주신 이야기를 듣고 당돌하게도 높은 곳에서 한 번 뛰어보라고 내가 시험했다. 심장병이 없었던 나도 높은 곳에서 뛰려면 심장이 콩닥콩닥 뛰며 무서운데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던 것 같다. 그 친구는 한 번 생각하더니 뛰어 내렸고 나도 따라서 뛰어 내렸다. 그 때 내 작은 손 안에서 숨가쁘게 뛰던 심장의 진동, 나나 그 친구나 비슷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예수님이 누군지 잘은 모르지만 예수님이 치료해주셨구나 싶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동네에서 유일한 내 또래 친구 복진이를 통해서 들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어서 만든 게 태초의 사람이고... 그 말에 코웃음을 쳤던 것 같다. 너는 미술 시간에 찰흙으로 빚은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는다고 움직이는 사람이 되는 걸 믿냐면서 참 이상한 얘기도 다 있다 싶었다.
그게 내 흑암,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거했던 나에게 들려온 최초의 복음이었다. 어린 시절, 안데르센 동화집에 빠져 있으면서 거기서 등장하는 기이한 일들도 하나님, 조물주와 연결되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대부분 번역서들 중심의 동화였으니 그 안에 녹아있는 기독교 세계관에 노출되면서 나의 죽음 이후의 세상, 내가 알지 못하는 그 곳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초 6학년 때였을까? 그 때는 재래식 화장실로 화장실이 교실과 떨어진 별채에 있었다. 한 낮이었는데도 깜깜한 그 곳에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나왔는데 환한 태양빛에 갑자기 혼미해지면서 유체이탈 같은 괴이한 느낌에 그 느낌이 무엇인지 싶어 다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일까? 철학적인 질문이 순간 쏟아졌고 너무 복잡하고 두려워서 본질에 대한 질문을 피하고 그냥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리고 친구 따라 교회를 갔는데 그 때에는 목요일 저녁 예배, 주일학교 모임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날 갔을 때 설교 시간은 어려워서 졸다가 즐거운 게임을 신나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딱히 우리 집에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철학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신은 있는가? 라는 토론 시간이 있었다. 나는 믿음은 없었지만, 신은 있다라는 주장을 폈던 기억이 난다. 어디선가 읽은 예화로 ‘하루살이는 하루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개구리는 한 계절만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분명 내일이 있고 다음 해 계절이 또 있듯이 인간이 알고 있는 이 현상이 다라고 생각하는 게 비극 아닌가?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 게 편협하다. 과학이 증명하지 못한다고 증명하는 이게 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알 수 없지만 다음 생, 이생은 분명 있고 그것을 주관하는 신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이 또렷한 기억력! 왜냐면 그 때 내가 말하고도 스스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 2때 수학여행에 설악산을 갔었는데, 정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런 멋진 절경 앞에 신은 분명히 있구나 싶은 탄성이 나왔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 예수님이라고 결정적으로 알려준 건 앞에 앉았던 은하라는 친구였다. 어느 날, 사영리를 교회에서 배웠다면서 내게 사영리를 전했다. 일원리~ 사원리를 말해주는데 그대로 시인이 되고 인정이 되었다. 그래서 은하를 따라 영접기도까지 했다. 그리고 가끔 점심 시간에 은하가 줬던 건지 인영이가 줬던 건지 기드온에서 나온 신약 성경 한 권을 받아들고 복음서를 읽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낳고 낳고를 반복하는데 인내를 갖고 넘기고, 사실 그런 족보는 내게 익숙했다. 우리 아빠나 할아버지가 앉혀놓고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족보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들었던 얘기니까. 아주 중요한 인물인 줄은 알겠지만 너무나 생소하고 어려운 이름들 그렇게 흘려보내면서 그래도 가끔, 와 이런 명언들도 있네 싶어서 밑줄을 긋는 대목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본격적인 성경 공부는 학교에 가서 UBF를 통해 시작했다. 근데 너무나 어려웠다. 기도도 낯설고 나는 익숙하지 않은 어떤 틀, 그게 참 어려웠다. 그냥 말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뭔가 어려워서 내 입에 배지가 않았다. 그래서 핑계를 대며 친구따라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겠다고 둘러대고 빠졌다. 교회 청년부는 사람들도 좋고 선배들도 멋지고, 찬양도 좋고 말씀도 좋았는데 기도, 특히 소리 내서 하는 통성 기도, 대표 기도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냥 일상적인 용어가 아니었다. 새로운 외국어를 배운다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는 맴맴 돌지만 입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이물감, 낯선 느낌이 내게는 무척 불편했다. 그래서 기도문이 열리기를 기도했던 것 같다.
그때 한참 새로 오신 전도사님을 중심으로 온누리 교회의 ‘경배와 찬양’에 영향을 받아 우리 교회에도 찬양단이 꾸려지고 또, 온누리 교회에도 가서 함께 찬양 집회에 참석도 하고 젊은 청년들의 뜨거움, 열정, 신앙 고백을 실은 찬양의 열기가 우리 교회에까지 미쳤다. 목요일이 청년부 예배였는데, 찬양 시간을 통한 신앙 고백은 내 마음을 뜨겁게 했다. 작사가들의 마음과 내 마음은 어쩌면 이렇게 일치하는지... 내가 쓰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이 이미 찬양 가사에 다 있었다. 나는 그 찬양을 부르기만 하면 되었다. 찬양을 통한 감사와 죄 고백, 결단.... 찬양 시간에는 매번 너무 울어서 퉁퉁 눈이 부었다. 그리고 그것은 찬송가에까지 이어져서 대예배 때에도 찬송 가사에 받는 은혜가 너무나 컸다.
그러나 여전히 기도와 말씀에는 건조했다. 그러던 중, 청년부 수련회를 놓고 릴레이 금식 기도를 했는데 거기에 참석은 하면서 수련회에는 핑계를 대고 빠졌다. 나는 요리조리 잘도 빠져 나가는 것 같다. 거기에 참석한 후배들의 모습이 바뀐 게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내 기도를 들어주셨구나 싶은 기도 응답에 대한 열매를 첫 번째 확인한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이 다 받은 방언의 은사를 나도 사모하면서 개인 기도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나도 드디어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어렵게 여겨졌던 기도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단어를 고르고 애쓰는 시간이 없이 그냥 인도하심대로 맡기면 되었다. 여전히 감사와 죄 고백, 찬양... 특히, 처음 신앙 생활했던 그 교회는 지하 2층에는 개인 기도실이 있었다. 믿음의 선배들이 해왔던 기도실은 하나님과 은밀하게 만나는데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그때부터 새벽 기도 시간을 더 사모하게 되었던 것 같다. 청년부는 언제나 뜨거운 건가? 그때 우리 청년부는 참 뜨거웠다. 수요예배와 금요 철야는 말할 것도 없고 끝나고 모여서 또 기도실에 가서 기도하는 시간들을 함께 가졌던 믿음의 친구들.... 정말 고맙다.
그러나 여전히 말씀에 대해서는 어려웠다. 목사님들의 책이나 설교를 통해서는 이해가 쏙쏙 되었지만 내가 읽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성경은 의무적으로 읽을 뿐이지 재미도 없었고 어려웠다. 더구나 고어체, 문어체는 더 딱딱하게 느껴졌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은 늘상 있어왔지만, 큐티는 시도했으나 번번이 좌절,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4년 성서유니온의 탁주호 목사님을 모시고 신우회 모임을 시작하면서 말씀의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2년 정도를 목사님께 의지하며 시도했지만 큐티를 지속하지는 못했다. 다만,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갖고자 했던 것 같다. 적용이 너무나 어려웠다. 적용이 안 된다는 건 본문 이해가 안 된다는 건데... 결국, 그 안에서만 갇혀 있었고 큐티에 대한 갈급함은 늘 있어왔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우리들 교회로의 인도하심은 내게는 너무나 큰 감사요 위로하심이었다. 여전히 큐티가 어렵긴 하지만 목장에서, 대예배에서 수요예배에서 큐티와 연결된 일맥상통함은 막힌 통로를 뚫어주고 연결해주고 넓혀주는 하나님의 확실한 처방이셨다. 흑암 중에 사망 중에 있던 나에게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도하심, 앞으로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열심! 감사하고 감사한다. 핑계 대며 뺀질거리고 은혜의 자리를 피했음에도 긍휼히 여기심으로 끝까지 붙잡고 이끌어 가시는 나의 하나님, 그분이 우리 아버지시다. 우리 아빠다.
멸시를 당하게 하심은 내 탓이고 내 삶의 결론이기에 부끄럽기만 했다. 오직 하나님께는 영광만 영화만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도 말씀하신다. 멸시를 당하게 하심도 영화롭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라고, 주님의 주권에서 벗어나지 않은 일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게 왜 이렇게 위로가 되는지... 그게 왜 이렇게 감사가 되는지.... 나의 숨은 부끄러움, 그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내가 져야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역시도 주님의 권리이셨음을 내게 말씀하시는 게, 거기에 대한 죄책감과 죄의식 역시도 하나님께 내려놓기를 바라시는 친밀하고도 따뜻한 위로로 들린다. 내가 드릴 수 있는 영광을 받으실 뿐 아리라 나의 치부와 멸시, 죄성, 수치까지도 받으시겠다고 하시니 죄 많은 나로서는 감사, 감사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하나님, 우리 아빠, 감사하고 또 죄송하다.
예수님은 모사, 상담가시다. 내 문제를 끌어안고 갔을 때 예수님은 나를 안고 울어주신다. 나와 함께 울어주신다. 막막하고 힘들 때, 나의 신랑 예수님은 언제나 나를 안아주셨다. 나는 울보 신부다. 예수님 앞에만 있으면, 하나님 앞에만 있으면 눈물이 난다. 감사해서 울고, 감격해서 울고, 기뻐서 울고... 죄송해서 울고 힘들어서 울고 속상해서 울고, 슬퍼서 운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잘 운다.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더 해지는 것 같다. ‘이 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게 나의 첫 고백이자 마지막 고백이기를 바란다.
난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보이지만,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굳게 세우고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그리고 이루리라 약속주시니 감사, 감사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질서에 순종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면 어느 사이,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돌아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찬양과 영광을 돌리면 되는 것이다. 아~ 하나님! 내 인생 중에 행하신 주님의 증거들을 바라보게 하심에 감사와 영광 돌립니다.
적용
1. 감사와 찬양
① 내 인생 중에 찾아와 주셔서 흑암 중에 사망 중에 빛을 비춰주신 최고의 하나님을 돌아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② 최고의 상담가 예수님처럼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하나님이 체휼하게 하시는 마음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③ 아들 15회 생일 준비를 기쁜 마음으로 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엄마로서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 늘 기억하겠습니다.
④ 주님의 약속하심을 또 다시 발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⑤ 날마다 새길 말씀 주시니 감사합니다.
⑥ 아들에게 너무나 피곤하여 못 데려다 주겠다 했는데 좀 쉬게 하셔서 데려다 줄 수 있는 기쁨 누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⑦ 안과에 주보지를 나누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환경에 감사하며 말씀에 눈이 열리는 훈련에 순종하겠습니다.
8월 19일 주일
제목: 하나님의 본심
이사야 9:8-10:4
요약
오히려 여호와께 돌아오지도 찾지도 않는 백성, 완악하고 교만한 백성으로 인해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않으며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이 백성이 각기 무례하고 거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불태워지고 소화되리라. 서로 불쌍히 여기지 않고 형제를 아끼지 않고 움켜지나 주릴 것이고 서로 대적할 것이다.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불공평하게 판결하며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고 토색하고 약탈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질문
1. 나는 돌아가 찾고 있는가?
2. 나의 사건이 심판의 사건인가? 구원의 사건인가?
묵상
주 앞에 예배 드릴 수 있는 시간, 너무나 귀하고 감격스럽다. 나같은 자를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 불러도 불러도 드려도 드려도 다 할 수 없는 감사와 찬양이다. 목사님이 6인 6색 설교를 다 들을 수 있는 기회라 하셨는데 설교 축제로 가슴이 설레였다. 원래는 1부 예배부터 드리려고 서둘렀지만, 어렵다. 그렇게 마음으로라도 서두른 덕분에 1시간 일찍 도착하여 준비하게 되는데 그게 은혜다.
정말 하나님이 바라고 바라시는 건 그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것, 진노의 사건일망정 그 사건으로라고 여호와를 찾고 바라고 돌아오는 것이건만... 완악하고 교만하여 오히려 맞이하고도 돌아오지 못한다. 나의 무례, 거만, 악행, 망령된 말 불태워지고 소화되는 게 복이다.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불공평하게 판결하며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고 토색하고 약탈하는 자에게 화가 있는 게 복이다. 심판이 있다는 게 복이다. 그게 감사다. 그걸로 끝장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을 계기로 돌아올 수 있는 게 복이다. 하나님의 중심이 보인다. 하나님의 본심이 보인다. 찬양 시간 내내, 예배 시간 내내 울었다. 하나님 사랑이 너무나 감사해서, 이런 귀한 공동체에서 귀한 말씀 들으며 예배드릴 수 있는 내 환경이 얼마나 축복인가?
지금까지 아들 생일과 남편 생일에는 시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나눠 먹었다. 아들 생일이 화요일인데 이번 토요일에는 갈 수 없었다. 주일 아침에 남편을 통해 음식만 전하면서 나는 왜 하는가? 묻게 된다. 그건 가장 좋은 것 주신 주님 때문이다. 가장 멋진 남편을 주신 부모님, 남편 있게 하시고 아들 있게 하신 분들이기에 감사하고 사랑해서다. 그리고 돌아보면 우리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께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알게 모르게 흉내 내고 있다. 남편은 내 그늘 밑에 덤으로 간다고 하시만 그건 내가 할 고백이다. 남편 신앙 덕에 나는 덤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런 신실한 남편을 붙여주신 하나님, 나를 후대하셨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불쌍히 여김이 부족하다. 형제를 아끼지 않는다. 정말 내게는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붙여주셨다. 이 교회를 통해 귀한 담임 목사님, 또 귀한 부교역자님들, 귀한 목장, 목자님, 부목자님, 목원들... 소중하고 귀한 이름이다. 또 오랜만에 예배 끝난 후 신정이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도 좋은 사람, 여전히 통하는 사람, 힘이 되는 사람... 세상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닐 텐데, 하나님의 후대하심이다. 내게 부족한 인내와 절제를 삶 가운데 행하는 사람, 형제를 사랑하는 모범을 보이는 사람, 하나님을 여전한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 언제나 꾸준하게 그 자리를 지켜주는 사람, 하나님이 주신 동역자이다. 함께 걸어갈 동지, 든든한 나의 동지다. 내가 그 사람인양 우쭐되게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그리고 가장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 우리 가운데 가장 큰 연결고리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이 귀결점이심에 감사하다. 어떤 사건이나 환경도 하나님, 구원으로 연결시켜 주심에 감사다. 불쌍히 여기게 하시고 그 모습 그대로 바라보게 하심도 감사하다. 지금, 내게 주시는 모든 환경 가운데 아멘! 할 수 있어야 함을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시니 감사다. 나는 순종만 하면 된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어서 얼마나 갑갑했는가? 이제 순종만 하면 된다.
적용
1. 감사와 찬양
① 아들 생일 음식을 나눠 먹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②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새벽까지 잘 완성하게 하시고 예배 시간에도 감동과 감격으로 함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③ 아들들을 통해 얻는 기쁨들을 누리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④ 찬양 예배와 대예배 은혜와 감동 가운데 함께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⑤ 신정이와 오랜만에 짧지만 교제케 하심에 감사합니다.
⑥ 오늘, 지금이 가장 행복함을 누리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⑦ 훼밀리 마트에 주보와 복음 팔찌를 나누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⑧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이해할 마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⑨ 앉아갈 수 있는 의자 주심도 감사합니다. 의자 없이 가면서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2.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깨닫는 대로 적용하는 순종을 배우겠습니다.
8월 20일 월요일
제목: 경계
이사야 10:5-15
요약
앗수르는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하나님의 분하고 한스러운 원한이다.
그러나 앗수르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큰 체하며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하겠는가.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질문
1. 나는 하나님의 도구로 나의 자리를 알고 있는가?
2. 사명의 경계선을 잘 지키고 있는가?
묵상
6인 6색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며 은혜를 각기 받았다. 우리는 각기 하나님의 도구로 그 자리, 나의 자리에만 있으면 된다. 은혜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요 은혜를 받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다 똑같지는 않지만, 목사님들 한 분, 한 분 삶의 경험과 독특성이 조합이 된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은 우리들 교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경험이지 싶다. 설교 축제, 말씀 축제의 시간을 만끽하며 함께 울고 웃는 시간... 수련회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나님은 나에게도 나의 자리를 알고 지키라고 하신다. 사실 비교될 수도 있는 그런 자리는 피하고 싶고 껄끄러운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향한 독특성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인증이 있는 ‘나’에 대해 내가 위축되거나 부끄러울 것은 또 없는 일이다. 세상에 다 똑같은 사람이 없는 게 얼마나 기이한가? 결국 같을 수는 없다. 목소리, 생김새, 성격, 경험... 얼마나 많은 변수가 있는가? 다 다르게 지으신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그 도구로서 나의 자리를 알고 그 역할에 순종하는 것이다.
나는 경계선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어디서든지 우선 경계부터 확인한다. 그래서 나의 안전성이 확보된 뒤에야 자유스럽다. 경계가 분명하지 못하면 불편하다. 내 영역이라고 생각한 곳에 나의 허락 없이 다른 사람이 들어왔을 때, 내 안에서는 경계경보가 발령된다. 침입자에 대한 탐색과 함께 나의 안전에 대해 점검이 들어간다. 그리고 나의 안전거리 확보를 위해 움찔, 뒤로 물러나거나 쳐내는 공격적인 행동도 나온다. 모래놀이를 했을 때, 나는 항상 나의 경계가 분명했다. 그러고보면 나의 실상에서도 그랬다. 엄마, 아빠처럼 편한 대상에게는 짜증으로 나가고 그게 남일 때는 긴장감으로 몸과 마음을 웅크린다. 그게 나의 경향성이었다.
하나님이 주님의 주권이심을 명확하게 못 박는 것을 보면서 내가 우리 아빠를 닮았나? 싶다.^^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에 순종하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과 사건을 해석하지 못하고 팔딱거렸다. 경계경보라는 것도 내게는 필요하지 않다. 그 부분에서도 놓이는 것, 내가 내 것이라고 내 영역이라고 잡고 있는 것도 내려놔야 함을 알겠다. 내 것이 어디 있는가? 내 몸? 내 마음? 내 영? 내가 갖고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이제 소유권이 이전 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내 소유라고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게, 내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는 내가 어리석다. 모든 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합니다~
적용
1. 감사와 찬양
① 헬스장에 주보를 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② 하나님의 도구로 나의 독특성을 인정하며 내 자리에서 역할을 다해야 함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③ 귀한 목사님들 6인 6색의 설교로 채움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④ 나의 경향성을 내려놓고 모든 권이 주님께 있음을 알게 하시고, 경계경보의 기준도 내게 없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로지 주님께 주권이 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⑤ 아들의 낮잠을 불쌍히 여기며 인정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⑥ 복근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내 체력의 한계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 사명의 경계선을 잘 지켜서 주님이 허락한 것까지만 관리하겠습니다.
8월 21일 화요일
제목: 두려움
이사야 10:16-34
요약
교만 방자했던 앗수르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은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앗수르는 하나님의 막대기가 되어 시온을 칠지라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네게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앗수르를 멸하시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치시고 혁혁한 위력으로 가지를 꺾으시리라.
질문
1.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2. 하나님의 심판권을 인정하고 있는가?
묵상
배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내 몸의 한 군데가 아픈 것을 못 참는다. 죽겠다고 소리친다. 덜덜 무섭고 떨린다. 놀이기구를 못 타는 것도 알고 보면 그 깊은 밑마음에 죽을까 싶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어젯밤에 갑자기 아픈 배, 여보~를 부르고 울부짖는다. 침 맞는 것, 누구보다 싫어하지만 침도 맞겠단다. 손을 따는 것도 괜찮다. 그래도 여전하다. 화장실에 가도 여전하다. 체했는지, 배가 차가왔는지, 배부른 상태에서 운동이 과했는지.... 식은 땀이 나고... 토해도 아프다. 매실즙 원액을 들이키고 또 토하고... 정말 많이도 토했다.
열심히 남편을 보채며 찾다가 문득, 예수님이 그제야 떠올랐다. 나는 이렇게 조금 아파도 발광을 떠는데 예수님 십자가는 얼마나 아팠을까? 예수님 믿다가도 좀 배가 아프다고 오만상이 찌프려지는데... 이렇게 아퍼하며 죽어도 얼굴에 예수님 믿은 표시가 날까? 더럭 겁이 난다. 죽을까가 아니라 이렇게 못 참아서 용쓰는 내가. 또 뒤늦게야 예수님이 떠오르는 나의 신앙... 예수님을 찾아서일까? 몸을 웅크린 채 이제 잠잠해졌다. 아픈 게 사라졌다.
남편은 엄살 피우고 징징대는 내 뒷수발에 토사물 치우고.... 동분서주, 바빴다. 그렇잖아도 바쁘고 분주한 남편 일상에 내 뒷수발까지 하게 한 게 미안하다. 게다가 험한 일을 시켜 미안하다. “험한 것 치우게 해서 미안해요” 하는데 “진짜 많이 먹었지! ” 한다. “뭐가~ 원래 내가 먹는 양인데... ” 하는데 남편이 헤아려주는 토한 내용물, 듣기가 멋쩍다. 그래도 감사함이 크다. 우리 남편에게 지금까지 서운하게 생각했던 작은 찌끼들... 이제 진짜 할 말 없게 생겼다.
몽둥이로 치는 사건, 나는 무섭고 두렵다. 그런데 무서워하지 말라신다. 내가 다치는 것, 내가 아픈 것, 피 나는 것... 너무나 무서워한다. 그래서 병원 가는 것도 싫어한다. 내 죽음을 맞이하며 우아하게 죽을 수 있을까 그 점도 걱정이다.
그리고 우리 아들들, 공부해야 할 때 공부하지 않는 것도 무섭고 두렵다. 숙제물을 봐주는데... 이렇게 멀쩡하게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잘 표현하는 놈이 왜 공부를 안 하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참 이상하다. 그 역시 하나님이 나에게 사용하는 막대기인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두려워 말라 하신다. 나를 때리며 나를 칠찌라도... 그 사건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신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남은 자로 돌아가는 것이다. 진실히 의뢰하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실 그 말씀을 붙잡고 돌아가는 것이 내가 행할 일이다.
적용
1. 감사와 찬양
① 아픈 중에 내가 찾는 우선순위가 예수님이 아니라 남편이었음을 보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② 남편이 잘 수발하게 하셔서 진정시켜 주심에 감사합니다.
③ 죽을까 싶은 두려움에서 이제 예수 믿는 신앙고백이 있는 죽음을 준비할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④ 아들들을 통해 치시는 매, 잘 분별하며 그도 역시 주님의 주권이심을 인정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⑤ 오늘 생일을 맞이한 아들들 주심에 감사하고 축복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실 주님을 믿고 의뢰하며 잠잠하겠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찬양하겠습니다.
3. 맛있다고, 먹고 싶다고 해서 너무 많이 먹지 않고 절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