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없이 지내던 나날들..
작성자명 [크리스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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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03.20
2007-03-20 데살로니가후서 (2 Thessalonians) 3:6~3:18
믿는 자로서
말씀 큐티하는 자로서
제일 혼돈스럽고, 민답한 일은
금식기도까지 하면서 열심내고,
말씀 잘 믿고 적용한다고 생각하는데..
사건이 주어졌을 때
지혜가 부족하여 이 사건을 어떻게 적용해야할지?
잘 알지 못할 때입니다.
인생여정에
수 없이 다가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
정답을 다 알 순 없지만
현실에 주어진 답답한 사건들,
말씀으로,
큐티로 다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시행착오도 많이 합니다.
훗날,
지나고 보면
아~ 그런 것이었구나.. 하면서
그 땐,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기도 많이 하고,
큐티 적용하고,
아무리 말씀으로 선하게
열심히 살아도,
사건에 대처하는 실질적인/구체적인 지혜 가 없으면
힘들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저희 가족은
1996년에 벨지움으로 이사해서
3-4년 작정하고 간 곳,
두 배나 되는 8년을 그 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훈련이 잘 안되니
시간을 더 연장시키셨나 봅니다.
벨지움에 가기 전,
미국의 보스톤 지역에서 10년 살았는데
제겐,
미국생활이 적응하기 쉬웠고,
10년 동안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을 떠나기 싫었지만
남편의 강권함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그 곳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벨지움이 처음부터 너무 싫었습니다.
벨지움은
언어가 화란어, 불어 2개국 언어가 공식 언어라서
새로 언어를 배워야
이웃과 인사라도 할 수 있었고,
슈퍼에 가도 뭐라고 쓴 건지... 알 수 있고..
어떤 미국사람은
뭐가 뭔지 몰라
고양이, 개등 동물애완용 음식을 사오기도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도로 표지판이 갑자기
화란어권 지역으로 들어서면
불어가 화란어로 바뀌어
생소한 지역을 찾아 가려면
갑자기 시각 장애인이 된 듯 합니다.
물가는
엄청 비싸고..
세금은 수입의 60% 이고,
집 사고파는 문제가 복잡하고, 비싸서
대부분 삭월세로 살고,
세 들어 산 집은
하루가 멀다하고
난방, 수도등..끊임없이 말썽이고,
고치러 온다는 사람들은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약속한 시간에 오지도 않아
온종일 기다리느나 방콕신세 이고,
아이들 학교도
언어가 다르니 영어권 학교 를 보내야 하고,
200 여개국의 대사식구, 파견 나온 직장인 가족, 유엔직원 가족,
그리고 파견나온 직장인 가족, 군인가족등,
우리나라 보다
면적은 훨씬 적은 나라인데
외국인이 주인인지? 할 정도로
외국인이 많았던, 특이한 나라였습니다.
나라마다
풍습과 전통이 달라
친구사귀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유달리
날씨에 민감한 저는
으시시 춥고, 회색하늘이 대부분인 그 곳,
30분마다
비가 왔다, 눈이 내렸다, 해가 떳다, 구름끼며
변덕부리는 날씨,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제 심정에
불을 붙였습니다.
교회는
천주교가 국교라서
개신교는 별로 없었고,
한인 교회는 100 명 이내의
교회가 두 군데 있었습니다.
한인 슈퍼는 큰 방 하나 정도의 싸이즈에
냉동음식, 말린 음식, 통조림 음식같은 것들이 있었고,
채소나 콩나물, 두부, 파등 싱싱한 음식은
일주에 한번
독일의 듀쎌 도프 란 도시에서(고속도로로 약 2시간 거리)
봉고차가 음식을 싣고 와,
몇 가지 싱싱한 음식을 살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먹고
기도하고 있었지만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감정이 이끄는 데로 살아가는
규모없는 생활 을 했습니다.
살만한 곳 떠나서,
하필이면
이런 곳에 끌려 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친구도 없고,
새로운 곳에 정착하려니 힘들고,
교인들도 대사관 식구들이 많아
분위기도 끼리 끼리 우리들만...
이전에
일반 교회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조금 색다르고 이상한 분위기였습니다.
구덩이 속에
깊이 빠진 듯한 느낌에
마음 속은 항상 원망과 분노 의 감정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고,
무엇을 해도 만족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저희 부부는 다툼이 잦았습니다.
일중독과 술중독에 빠진 남편,
불만가득으로 시한폭탄을 앉고 살아가는 아내..
대화가 쉽지 않았고.. 넘넘 힘들게 살았습니다.
벨지움을 떠나기 1년 전 즈음,
김양재 목사(그 땐, 집사로 간증하던 즈음),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분이
큐티로 살아나
간증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음악하는 분, 교육수준 높은 호랑이 남편과 그 아내, 나이 비슷한 여자)
그 분의 간증과 큐티로
내 사건이
조금 이해 되었지만,
큐티적용 100%는 멀었고,
문제는 여전히
큰 산더미로 남아있었습니다.
때문에
내 사건해결을 위해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과 관련된 치유에 관한 책을 읽고,
훌륭한 목사님들의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여 듣고,
정규코스의 치유과정도 거치고,
그러는 동안,
분노의 원인을 알게 되고
구속사적으로 내 사건 해석이 되었고
바다같이 엄청, 넓고 크게 비어있는,
목마른 제 영혼에 비해,
치유는,
이슬비 같은 분량과 속도로 서서히 시작되어
많이 치유되었지만
아직도 공사 중입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터득하는 것 같은데
저는 머리가 둔해서인지
깨달음이 늦어
많은 세월을 규모없이 보내다
스트레쓰가 많이 쌓여
지금의 암 투병 까지 이르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는 요즈음입니다.
그런,
시련의 과정을 통과하는 중에도
주님은 분주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평소에
남편에겐 신학교 의 신 자도 꺼내지 못 했고,
예전에
보스톤에서 음악공부 할 땐,
비싼 등록금 지불한다고
엄청, 마음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자원해서, 비싼 등록금 지불해가며
신학공부하라고 적극 장려했습니다.^^
덕분에
무사히 마치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 다음 일은
어떻게 진행하실지,
투병 중인 지금,
큐티해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들려지는 음성이 있겠지요.
그후,
남편의 뇌출혈사건,
시아버님의 소천,
어머니의 소천을 통해
우리부부 사이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규모없이 생활하는 동안에도
주님은
제 인생을 그렇게 간섭하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주님은혜가 놀라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