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향기
(QT본문: 고전 16장 13절 ~ 24절)
2012-08-04. 토요일.
[본문: 고전 16장 13절 ~ 24절]
[관찰]
바울의 권면
1. 깨어 있으라. (13)
2. 믿음에 굳게 서라. (13)
3. 남자답게 용감하고 강건하라. (13)
4. 모든 일을 사랑 안에서 하라. (14)
5. 교회와 성도를 자발적이며 헌신적으로 섬기는 이들(스데바나와 집안 사람들)에게 순종하고, 이들의 수고를 알아주라. (16, 18)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1.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은 아가야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믿음의 가정이다. (16)
egrave; 스데바나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그 후 스데바나는 가족에게 복음을 전해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고전1:16)
2.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였다. (16)
3.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은 성도들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었다. (17)
egrave;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족했던 사랑의 나눔을 보충해 주기 위해, 이들은 교인들에게는 바울의 충고와 애정을 대신 전해 주었고, 바울에게는 교인들의 애정을 대신 전해 줌으로서 바울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4.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은 사도 바울과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 (18)
문안과 축도
1. 바울은 아시아의 교회들과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와 모든 형제와 자신도 친필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문안한다고 전한다. (19~21)
2. 바울은 이들의 문안에 고린도 교인들도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권면한다. (20)
3. 바울은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친다.
egrave;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 자기 생각과 행동을 고집하는 일부 교인들에게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함
4.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신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하기를 축도한다. (23, 24)
[교훈 적용]
오늘 본문을 통해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을 묵상하면서, 아! 이런 것이 그리스도의 향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 온갖 냄새가 있지만 다 같은 냄새가 아니다.
맡으면 뭔가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고, 기쁨이 되고, 마음이 시원하게 되는 냄새가 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문제가 더해지고, 괴로움이 되며, 마음이 답답해 지는 냄새도 있다.
오늘 본문은 기쁨을 주고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그리스도의 향기, 막힌 속을 뻥 뚫어주는 스데바나 집안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스데바나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스데바나가 전한 복음을 듣고 나머지 가족들도 예수님을 영접하여, 스데바나 집안이 아가야에서는 바울 전도의 첫 열매가 되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의 모델이 된 집안이 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 보낸 편지, 고린도 전서 1장에서 아가야 지방에서 세례를 준 사람은 스데바나 집 사람(고전1:16)뿐이라고 교인들에게 밝힌 바 있다.
이런 이유로 바울에게 있어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복음의 첫 열매요, 그 집안에서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스데바나가 자기 집안 식구들까지 전도하여 그리스도 인이 되게 하였으니, 참으로 스데바나의 믿음의 확실성과 그 증거에 바울은 적잖게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
스데바나와 같이 우리 집안 복음의 첫 열매다.
그리고 가족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아버지가 영접했고, 소천하신 엄마가 영접했고, 누나와 막내가 영접했고, 눈물로 기도했던 여동생이 시댁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
하지만, 집안의 셋째, 그리고 처가 집안이 아직 믿지 않고 있다.
우리 아버지, 막내는 아직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다. 여동생은 열심으로 부녀회장이다 뭐다 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으며, 누나는 그저 교회에 나가는 정도다.
이제는 집안의 복음화와 관련하여, 아직도 믿지 않는 셋째와 처가집안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부분이 남아있고, 또 더 나아가 이미 믿은 가족들의 믿음이 잘 성장 되어야 하는 부분이 남아있어, 기도하며 삶의 모범을 통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믿음의 가정을 세워가야 할 것을 다짐해 본다.
둘째, 스데바나 집안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였다.
본문 15절은 “스데바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they have devoted themselves to the service of the saints) 너희가 아는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도들도 이미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이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을 했길래 성도들까지 그 섬김을 알고 있었을까?
사도행전 4장32절은 “믿는 무리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건 데, 그들은 예배드릴 처소를 제공하고, 가진 재물을 나누고, 가난한 자를 섬기는 등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낮은 자세로 섬김을 실천하여 주변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의 섬김이 가치로운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중의 하나는 자발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발성이 없는 섬김은, 예를 들어 누가 이야기를 하여 어쩔 수 없이 섬긴다거나, 혹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섬긴다면 그 섬김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기쁨이 있을 수 없고, 또 남이 제대로 알아줄 리가 없다. 사람들의 눈이 얼마나 정확하고, 또 이기적인데, 그렇게 잘하는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오히려 가십하고 시기 질투하지, 잘한다 칭찬하지 않는다.
하지만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조차 감동시켰다면 그러한 검증의 과정을 다 거쳐 누구 하나 이견을 달 사람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기쁨으로 행하는 자발적인 헌신에 대해 사람들도 진정성을 느껴 이제 더 이상 그런 가십까지도 없어졌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난 수요일 "십자가 지기로 결정하는 것이 구원으로 향하는 피할 길이며, 예수로 피해야 한다"고 목사님 말씀하신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감당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 십자가 아닌가?
사람마다 주어진 십자가는 다 다르다. 어떤 이는 고난의 형태로, 어떤 이는 인내의 형태로, 또 어떤 이는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며, 이것을 지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를 통해 전도가 되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있어 십자가는 말씀이다.
나의 삶의 여정을 아시는 우리 목자님도 십자가라 하시며 지고 가라 하신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깊이 묵상하고, 생각을 정리하여 기록하는 이것을 통해 내가 변화되고, 나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또 다른 성도들에게 이러한 삶을 도전하고, 도움이 된다면 이 또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 참 이상하다. 과거 하나님에게 푹 빠져 말씀이 그렇게 꿀송이처럼 달아 말씀에 집중하고 그러다가 큐티를 하고, 기록한 내용을 홈페이지에 올리니, 은혜받았다 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십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그런데 그 가십하는 사람들은 주로 리더급에 해당되는 지체들이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얼마 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말씀에 집중하여 연구하고 묵상한 내용을 기록하고 홈페이지에 올리는데 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가 보더라.
하지만 중요한 점은 내가 그렇게 은혜받고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하는 것이며, 하나님 다 알고 계시고, 이를 통해 내가 알고, 내 아내가 알고, 내 가족이 알고, 지인들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것이 뭐가 그렇게 대수로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오직 내게 주신 십자가지고, 하나님 찬양하며 이 길을 갈 뿐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붙잡아 주실 것을 믿는다.
셋째,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은 성도들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 와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
본문 16절은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리도 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특히 부족했던 것이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이에 사도바울은 13장을 할애해 가면서, 은사가 그렇게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꽝이다 이렇게 하면서 사랑으로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에 덕을 세울 것을 권면하였다.
이로 보건데, 바울 사도가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다”고 하는 표현 뒤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사랑으로 하지 못한 그 무엇을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이 보충해 주었고, 이로 인해 바울이 기뻐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지만, 또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다니던 바울 사도에게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복음을 전한 이후에 어떻게 그 복음을 지켜가고 있으며, 문제는 무엇이고, 그리고 성도들이 바울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하는 소식은 바울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아니었을까?
이 소식을 스데바나 집안사람들이 바울에게 교인들을 대신하여 해 주고 있으니, 참으로 고린도 교회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행동이요, 바울을 기쁘게 하는 행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가 여러 지역에서 사역을 하면서, 각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교훈을 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가 있는 것인데, 아무 소식도 알 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딱히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텐데,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이 이렇게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와서 문제가 뭐다, 지금 상황이 어떻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 때, 바울의 마음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걱정이, 이제는 어떻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이 되니, 얼마나 그 마음이 시원했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스데바나 집안사람들의 이러한 이타적인 삶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면서, 복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라는 생각을 하였다.
죽어 마땅한 쓸데없는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한 성도가 되었으니, 그 십자가 사랑이 감사한 것이요, 날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니 그 은혜에 감격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부족한 부분이 없었을까?
아니다. 어떤 형편에 있는 사람도 다 저마다 부족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더 나으니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부족을 메우는데 삶의 중점을 두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부족을 채우는데 중점을 두고, 관심을 갖고 실천을 하였기 때문에 그 진정성을 사람들이 알아주게 되었고, 이렇게 성경에까지 기록된 진정한 섬김의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주일 1부 예배 끝나고, 같은 목장을 하고 있는 부목자님의 아들 인생진로에 대해 상담을 해 주기로 하였다. 벌써 몇 주전부터 그 아들에 대해서는 이미 부목자님께서 오픈을 하셨고, 함께 중보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함께 하셔서. 그 마음을 열어주시고, 복음 안에서 가치관의 전환이 일어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릴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을 기도한다.
주님!
오늘 스데바나 집안사람들의 섬김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앞서,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었고, 영적 아비인 바울 사도의 필요를 채워주는 진정한 주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깨닫게 됩니다.
매일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며, 복음의 감격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런 섬김의 삶을 키워갈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내 문제에 빠져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주님에 대해 몰염치한 자가 되지 않도록 주님 붙잡아 주시고, 오직 주님 안에서 문제 이면에 있는 주님을 바라보며, 회복시키시며,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실 주님을 신뢰하여 나아가는 복된 오늘 하루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