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큐티
작성자명 [안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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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03.08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14)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고 계시의
말씀을 골로새 교회에게 선포하셨던 바울이 실제로 그 말씀을 본인에게는 어떻해
적용시켰는지 바울의 큐티를 상상해보는 아침이네요
바울이 서신의 끝부분을 유난히 사람들 이름으로 언급했다는 것이 바울에게는 실제적인
적용이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라는 예수(할례당)
에바브로
라오디게아 교인들
사랑받는 누가와 데마
눔바와 그 여자 집에 있는 교회
아킵보
바울은 사람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열거하며 그들이 헬라인이든 유다인이든
야만인이든 자유자이든 노예이든 분별치 않고 오직 저들을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로
구성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는 자라는 것을 골로새 성도들에게 저들의 안부를 일일이
전함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을 봅니다
특히 오늘 아킵보 에게 주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 고 신신당부하는 말씀에
직분은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직분을 일구어 나가는데 얼마나 삼가야 할 것들이 많은지.....
울 남편 성질나면 노모님께 제발 그 장로! 장로! 라고 부르지 마세요? 라며 소리칠 때가
있지요
그 직분 교회에서만 부르면 되지 왜 집안에서까지 들어와 오만 것에 다 장로! 장로!라 부르며
아들 목을 쪼이냐며........
전 아킵보가 무슨 직분을 받았는지 잘은 모르지만 주인으로부터 도망쳐나온 오네시모
이야기를 쓴 빌레몬서에 거론된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하다면 바울이 두기고와 함께 오네시모를 딸려 보내는데 바로 그 오네시모의 주인이 아닐까
합니다
만일 그가 오네시모의 주인이였다면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어야한다는 그리스도인 이란 직분에 성실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 제게도 적용을 시켜봅니다
내가
만일
그의 몸된 우주적인 한 교회의 지체로
이 광속의 거리에서 부름을 받았다면
이 방만한 세기적인 직분을 삼가 어찌 이루어야 할 것인가?
오늘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준 서신을 라오디게아교회에게도 볼 수 있도록
명하는 동시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쓴 서신도 골로새 교인들이 읽을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의 보고인 말씀의 공유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을 오늘 봅니다
말씀의 귀족화가 아니라
말씀의 서민화
말씀의 보편성(모든 사람에게 다가 감)
말씀의 편만성(우주성)
말씀의 영구성(영생)이야말로
저로하여금
말씀이야말로
그의 몸된 우주적인 한 교회의 지체로서의 우주적인 직분을 삼가 이루도록 끊임없이
모든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영광과 부요와 모든 능력이신 주님의 진액이 아닐까 합니다
근데 아무리 안쓸려고 해도 또 종열 형제님을 쓰게되는데 참으로 저도 별 수 없이
편애하는 자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처지이네요
골로새를 묵상하는과정에 목자 직분을 받으신 종열님께
오늘 울 바울님께서 주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 명하시는 것을
들으니 피해갈 수도 없고...........
받은 그 직분을 이루어나간다는게 얼마나 버겨운 일인지 어제는 차를 견인해갔다고요?
정아님 말이 자꾸만 떠오르네요
울 기도해요
끝으로 그의 몸된 우주적인 교회가 끝까지 지켜야 할 차별성이 있는가하면(그리스도의 유일성)
버려야 할 차별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봅니다(신분, 빈부, 학벌, 가문, 성, 타교회, 타지역, 타국가, 타민족 타 문화 등등)
그런의미에서 제가 예전에 쓴 글을 여기 다시 올려봅니다
백치, 백치 아다다 예수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낼 자 라는
그대 이름의 뜻따라
그대 이름의 길따라 가노라면
닐리리
닐리리
고개 고개 산고개
넘어가던
아득한 보리피리같은 네 백성을 만난다
슬픈 네 가시 면류관 저너머
새 하늘
새 땅의 궁정이 보이고
한 #46468;
찬란했던 신라의 금관보다
더
황홀한 네 왕관이 보인다
그러나
사나운 가시관에
덩어리채 쏟아진
석양빛
네 영혼을 보면
왕국보다
왕관보다
자기 백성
그리워
찾아온
백치
백치
백치 아다다
바보 예수가 웃고 있어
나도
네 백성이 그리운 바보시를 쓴다
이 시는 젼 세계의 교회가 분단 한국을 위해 기도하는 해로 지정했던 1996년 봄에 북녁의 백성들을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전 그해에 여선교회장을 맡은 이상 부득불 저희 교회 대표로 캐나다 연합교단이 주관하는 행사에 참석했었는데 그해에 캐나다 연합교단은 소수민족들을 위한 배려로 소수민족들만을 위한 독립된 지부을 창설하기도 했읍니다.
그 새롭게 창설된 소수민족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알버타 에드몬튼에서 삼박사일을 체류하며
세계 여러 민족들과 함께 저희 분단 국가를 놓고 기도했을뿐만이 아니라 21세기가 지향하는
교회를 놓고 의논하는가운데 진실로 주는 만유의 주재이심을 다시 확인하게 되였답니다
위의 시는 계용묵의 단편소설 백치 아다다 에 나오는 여주인공 확실이 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저역시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장소를 초월하여 영원히 살 수 밖에 없는 가치를 위 시의 주인공인 예수 를 통해 그린 것입니다.
신기한건 그 이듬해 여름 저는 캐나다에 사시는 계용묵 선생님의 동생댁에 초청받아 가게 되였는데 부인이 어찌나 국어를 사랑하는지 그 외진 곳에서 오래도록 이민 2세들의 한글교사로 수고하고 계셨읍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오늘날 저역시 그 시를 썼던 그때와달리 변질된 제 영혼을 봅니다.
고침받기를 소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