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0일 토요일
제목: 내 안의 악
시편 145
요약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날마다, 영원히 송축하리이다. 광대하심, 주의 행사, 주의 능한 일을 찬양하며 선포하며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주의 크신 은혜,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은혜로우시며, 자비, 오래 참으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며 선대하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감사하며 송축하리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 영원한 나라, 주의 통치,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고 일으키시고 때에 따라 식물을 주시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며 행위가 의로우시며 은혜로우시다. 간구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
질문
1. 나의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나는 주를 높이고 송축하고 있는가?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심을 믿는가?
묵상
나의 걸음, 나의 말, 나의 소속, 나의 생각, 나의 행실...
버스 안에서도 흥얼흥얼, 주 찬양이 나온다. 의식하고 잠잠이 누르려 해도 안에서 꿈틀거리는 주를 향한 사랑과 감사, 그런데 그것과 함께 나의 생각과 나의 행실에서는 상대를 못 받아들이고 내치고 배척하고 싶은 마음 역시 요동쳐서 꿈틀거리며 흘러나온다. 나 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송축하는 일, 얼마나 기쁘고 벅차고 감사하고 즐거운 일인가? 하지만 다름, 다른 시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함께할 때, 그 마음은 어딘가 숨어버리고 보이지 않는다.
미술관에 함께 가서 감상을 하고 밑에 찻집에서 담소를 나누며 가는 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던 나는 허둥지둥, 먼저 가겠다고 나서는 두 사람이 이상했다. 섭섭하고 서운했다. 따로 시간을 내서 저녁 회식을 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단 10여분이라도 앉았다가 나갔다면 그랬을까? 내 생각에는 적어도, 아무리 바빠도 10 여분, 30 여분의 시간은 낼 수 있어야 한다. 자기는 먹을 게 없다고 나가야 하는가? 함께하는 공동체를 세상에서 꿈꾸는 나의 잘못된 이상! 나는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모이고 함께하는 걸 좋아한다. 교회에서고 세상에서고 함께하며 비전을 나누며 이상을 펼치길 원한다. 그게 하나님을 송축하고 하나님을 소유한 자의 본분이고 사명이라 여긴다. 그러나 같은 생각으로 모이기도 어렵고 힘들지만, 같은 생각이라 해도 방법은 비슷해 보일 수 있어도 본질은 비본질과 다르다는 사실, 6과 7, 인본주의와 하나님은 너무도 비슷해 보이지만, 분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체휼된다.
나는 왜 그 행동이 그렇게까지 싫고 혐오스러웠을까? 서운하고 섭섭함의 근원이 무엇이었을까? 어제 만나서 “섭섭했고 서운했습니다.” 말씀드렸다. 혹시, 마음 상하는 게 있었느냐 여쭸다. 아팠고, 머리도 해야 하고, 또 먹는 걸 싫어하고... 의 말씀을 하시는데 그 연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궁색해보이고 안쓰러웠다. 그렇게 생각했다니 미안하네~ 말씀은 그리 하시지만, 미안하셨을까 싶다. 아닌 것 같다. 거짓 평화, 갈등을 피하고 직면하지 않으려는 회피함으로 들렸다. 말씀을 드리기 전에는 섭섭함만이 있었는데 듣고 보니 실망감이 더 했다. 조직의 리더가 조직을 그렇게도 모르는가? 나는 근본적으로 리더에 대해 불신과 신뢰가 명확하다. 저 사람은 신뢰할 만한 사람, 저 사람은 불신할 사람... 아마도 나는 이제 그 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을 것 같다. 그게 슬프다.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고 납득하며 수용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 왜, 선대하고 긍휼의 눈과 마음이 되지 못하는 지에 대한 나에 대한 질책, 괴롭다.
힘에 있어서, 내가 볼 때는 이미 밀렸다. 내가 물리적으로는 약하나 내면에서는 강하다. 그걸 이미 나도 상대도 감지했다. 그러기에 저 안 깊숙이 상대를 얕잡아 보는 나의 교만함이 올라온 것일까?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내면의 강함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게 예수님을 알고부터 생긴 나의 당당함이기도 하고, 나의 내면 탐색을 시작하고부터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나의 바람이 큰 것이었을까? 표정에서 난처함과 함께 두려움도 읽혀진다. 나의 윗질서라고 생각한 나의 오류이기도 하다. 내가 더 넓고 깊어야 한다. 예수님을 소유한 내가 더 큰 그릇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품고 가야할 사람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 쪽에서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나의 편협함이 꼬인다. 당연히~ 마땅히~ 그럴 수 있음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인정이 안 된다.
나는 소수자의 입장에서라기 보다는 대부분 다수자 편에서 살아왔다. 시기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이후부터 소수자 입장이었다. 그리고 아기가 없이 지내는 것, 그게 소수자의 입장이었다. 남들은 아무 생각 없이 또, 상처가 되지 않을 농담이나 말에도 그게 나에게는 아픔이었다. 다수가 모이는 곳은 피하게 되고 백일, 돌 모임은 가능한 핑계를 댔다.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임신부와 아이와 함께 하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미 아픈 상처를 갖고 있기에 살짝만 건드려도 나는 아프다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곳에서도 소수자이다. 혁신을 하고 싶어하는 5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힘에 있어서는 더 우위같다. 혁신으로 가는 추세, 이미 바람은 불었다. 그리고 그게 다 옳고 괜찮다고 인정은 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고 싶지는 않다는 주춤거림, 그게 걸림돌이다. 그러나 지금은 건드려도 아프다고 소리치지는 않는다. 소수자의 입장에 있지만 그건 내게 상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떼거지로 건드려도 안타까울 뿐, 괜찮다. 내가 품고 가야 할 상대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변화는 두렵다. 그냥 있고 싶다. 익숙한 것이 좋고, 새롭게 달라져야 한다는 건 부담이다. 익숙하다는 건 한편의 치우침인 것 같다. 낯선 경험, 새로운 것에 대한 탐색, 안 해본 것에 대한 시도, 평소에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경험은 치우침을 채우는 균형을 선물한다. 균형을 잡기 위한 성장, 그 성장을 목도하는 자의 기쁨... 결국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달란트를 잘 계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균형있는 성장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그냥 간 것에 대해 이토록 에너지를 쓰고 있는지.... 예수 믿지 않는 분, 불교신자인 그 분을 볼 때 안타까워야 하고 더 기도해야 하는데, 섭섭한 건 웬 말인가? 내가 상처받은 건 아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실망감이 크다. 그럴 줄 몰랐다니... 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두 분 중 한 사람은 믿는 분이시지만, 가족 신화에 내 것만 찾으시는 분으로 비춰졌었기에 나와 동역자의 입장이 아닌 행태가 안타까웠다. 그렇기에 마땅히 기회만 되면 먼저 갈 분이라는 예상이 되었던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이 그러실 줄은 몰랐던 것 뿐, 그건 나의 무지와 무분별함이었던 게지, 그 분의 책임은 아닌 것이다. 그 분은 그럴 분이셨다. 다만 내가 예상하지 못 했던 것뿐이다. 내가 섭섭하게 여긴 건 나의 오버이고 나의 지각 없음에 기인한 것이다. 이 역시, 내 삶의 결론이다. 괜히 혼자 기대하고서는 혼자 실망하고... 정죄하기에 이르다니...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임을 또 놓쳤다. 이제 좀 마음이 편하고 정리가 된다.
내 안의 악, 하나님 앞에 멸절되어야 마땅한 내 안의 악이 근원이다. 내가 받을 이익이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선대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무시, 교만함, 내게 주어지는 이익이 없을 때 섭섭함과 서운함, 나를 알아주지 않는 상대에 대한 불편함이다. 내가 갖고 있는 가장 좋은 보화를 나눠줄 대상으로만 바라본다면 아무 불편감이 없을 텐데... 갖고 있는 것보다 받아야 할 것, 대접 받아야 할 것들에 대한 쓸데없는 기대감은 올무가 되어 내 심기를 꼬이게 하고 아프게 한다. 그래서 마땅히 찬양해야 할 그 자리에서 미처 왕이신 주를 바라보지 못하고 찬양이 멈춘다. 오직 혼자 있을 때, 믿음의 형제 자매와 함께 있을 때에만 살아나니.... 나는 중환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이고 선포하고 감사하고 존귀함을 드러내야 할 때, 움직일 수 없는 건 치명적이다.
나의 걸음, 나의 말, 나의 소속, 나의 생각, 나의 행실... 주께서 아시고 보시고 들으시오니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내 안에서 치료하셔서 악한 걸 멸하시고 주의 의와 은혜를 노래하게 하소서. 부르짖을 때에 가까이 하사 소원을 들으소서.
적용
1. 감사와 찬양
① 밀린 일들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② 끙끙대며 에너지가 소진되었던 일에 대해 가닥을 잡게 하시고 나의 이기심을 보고 나의 악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③ 회개할 인생임에 더 없이 감사하고 말씀 안에서 들려주시니 더욱이 감사합니다.
④ 예수 믿는 소수자이지만, 존귀하신 왕을 모신 그릇답게 깊어지고 넓어지게 하실 주님을 의뢰할 마음 주시고 나와는 다른 사람에 대한 거리두기에서 품을 마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⑤ 나의 근원과 본질을 잊지 않게 하시고 정체감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되 나의 악과 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⑥ 주를 송축하고 묵상하고 노래하고 감사하는 시편으로 초대해주셔서 함께하시니 감사합니다.
⑦ 주님이 주신 인생으로 사는 동안, 내 안의 고백이 다윗같이 되기를 소망하는 소원 주시고 믿음의 동역자를 붙여주셔서 나누며 함께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⑧ 이 세상에 속한 사람 가운데 환자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지만, 내가 그 가운데 중환자임을 알게 하시고 인정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⑨ 치료하실 주님을 의뢰하며 간구하게 하셔서 가까이 하시고 구원을 이루실 주님을 묵상하게 하시니 주님을 찬양합니다.
⑩ 휴식을 주셔서 쉬게 하시고 그 가운데 또, 아마겟돈 전쟁으로 아들들의 싸움과 나의 폭발을 보게 하셔서 회개할 마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⑪ 내가 죄인임을 알게 하는 수고, 아들과 남편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애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⑫ 여전히 남편을 바라볼 때, 떨림과 설레임을 주시고 옥시토신을 주시는 하나님의 후대하심과 사랑하심에 감사합니다.
⑬ 나눔을 통해 나의 악과 죄에 대해 그럴 수도 있지~라는 간과하는 마음, 홀대하는 마음을 회개하게 하시고 음란에 대해 다시 경각심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⑭ 비가 오는데 우산을 준비하지 못해 비록 비는 맞았지만, 불빛 사이에 비치는 빗줄기의 아름다움과 빗소리, 차가움의 감촉... 모두를 놓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⑮ 또 비록 잠에 픽~쓰러져 자는 악을 행하는 고멜이지만 호세아 같은 남편을 주셔서 잠 자다가 일어나 고멜을 찾아 나서는 귀한 남편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9327; 먹을 것을 앞에 놓고 투닥거리며 싸우는 아들들이지만 엄마를 그 자리에 초대하며 먹으라고 권하고 빗속을 뚫고 흔쾌히 학원을 가는 아들들을 만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9328; 과자 세 봉지에 “1000원인데 실컷 먹겠지요?” 하는 가게 아줌마의 흔쾌하고 순수해보이는 말투에 웃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9329; 남편을 위해 감자전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시고 맛있게 먹는 남편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9330; 오후에 차를 사용해야 할 내 처지를 아시고 세워둔 곳을 알려주는 세심한 남편의 음성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9331; 아무도 없는 고요함을 평안하게 느끼며 이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호흡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12881; 공부 못 하는 아들, 집중 못 하는 아들에 대해 짜증도 있지만 화가 올라오지 않고 인정하며 내 죄를 보고, 하나님을 부르짖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12882; 간만에 없는 연수의 여유로움을 느끼며 나를 정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12883; 시아버님, 2주 격리하여 집중 치료 받는 날이 거진 채워지게 하시고 전화 통화로 사랑을 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12884; 게으르고 악한 내게 하나님 후대하심으로 주신 귀한 직장에서 교회에서 집에서의 직분, 일 년의 반을 마무리하게 하신 은혜 감사합니다.
2. 내가 높이고 송축할 그 자리,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높이겠습니다.
3.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체휼하며 잘 수용하며 섬기는 지혜를 구합니다.
3. 나의 악을 멸하시고 보호하셔서 주님만을 드러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