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여주시면 회개할께요
작성자명 [박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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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02.07
2007-02-07 마가복음 (Mark) 11:12~11:26 ‘붙여주시면 회개할께요’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우리들교회에 온 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기도의 능력을 체험했다.
그 중에서도 최근 두 번의 형제와 지체의 치유 과정에서 보여주신 기도 응답은
오늘의 본문에 대한 생생한 간증이라 생각된다.
11월 중순에 동서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집 근처 영동 세브란스에 입원했을 때
여러 지체들과 우리들교회 중보기도 팀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생명을 건 두 번의 고난이도 수술을 무사히 끝내 주셨고
엊그제는 포장마차 나들이까지 허락해 주셨다.
지난 달에는 정정민 집사가 똑같은 증세로 그 병원에 입원했고
같은 의사,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실에서 큰 후유증 없이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그 수술 받고 큰 후유증 없이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데
하나님은 두 번의 수술에서 두 번의 기적을 보여주셨다.
두 경우의 공통점은 지체들의 간절한 중보 기도가 있었다는 점인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며 하나님께 아뢰는 자세를 다시 한 번 점검 해보았다.
의심치 말아야, 즉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입에서 나오는 기도, 형식적인 기도, 중언부언 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 당신을 믿고 의지함에 성령님이 감동하는 기도만이
응답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신다.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고 구하는 것으로 네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말씀하신다.
받은 줄로 믿었는데 병이 악화되었다. 시험에 떨어졌다.
그게 네 삶의 결론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신다.
재형이가 아직까지 연전연패다.
실용 음악, 그 중에도 흔하디흔한 기타로 짧은 기간 준비하여 대학 문을 두드리는데
아무데도 열어주는 곳이 없다. 기도하고 구하는 대로 주심에 점점 겸손해지고 있다.
맨 처음 본 예능계의 S대인 서울예대에 합격했더라면 나 먼저 기고만장했을 것이다.
자랑할 것도 없는데 얼마나 자랑하고 다녔겠는가?
얼마 전에는 너무 귀해서 그러는지, 세상에 이름도 숨겨온 대학에 또 떨어졌다.
이렇게 비꼬아 말하는 내 표현 자체가 기복의 산물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름, 명성,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는 외식적인 마음에서 성령님이 감동하실
간절한 믿음의 기도가 나올 수 있겠는가? 스스로 반성 해본다.
오늘 본인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숭실대 CCM 전공 실기시험 날이다.
얼떨결에 기도한 말이 “하나님 붙여주시면 회개할께요. 붙여주세요”
급하긴 급했나보다.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4년 전, 사업이 부도나고 채권단이 구성되고 대표가 선임되어 빚잔치를 할 때
자기들이 뽑은 대표를 의심하여 별도로 행동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채권단 대표가 그들의 사악한 계획을 귀띔해 주기를
나에게 시비를 걸어 내가 폭력을 행사하도록 유도하여 상처를 만든 후
이미 있는 증세를 더해 진단서를 끊어 나를 구속시키면
합의서를 받기 위해서라도 숨긴 돈을 내놓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채권을 회수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저녁에 그들이 찾아 왔고, 여자인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맞고도
경찰서에 연행된 나는, 은밀한 곳을 발로 심하게 채였다는 거짓 진술과
자신의 역할에 따라 위증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증인의 활약에다
사이비 병원의 돈과 바꾼 진단서 덕분에 폭력 전과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위증해서 나를 전과자로 만든 그 여자는
아내에게 매일 말씀을 전해주며 얻은 신임과 경건의 외식으로
아내로 하여금 회사 자금을 자신의 카드 빚 돌려 막기에 유용하도록 해서
엎어져 가는 사업을 덮쳐누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그 날 동생이 여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뺨을 맞을 때, 옆에서 말리던 누님이
내가 직접 신고해서 부른 경찰에 연행되어 갈 때
나는 죄 없으니 걱정 말라는 내 말 때문에 경찰서에 와서 진술은 안했다 쳐도
사건의 전말을 다 알면서, 그들을 용서하라니....
그 때 나를 위로하며 들려준 말씀이 오늘의 본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더니
요즘, 이해됨은 물론이고 그 일 기억하는 것 자체가 심드렁해져서
그 분 이름은 기억나도 밉다든지, 나 돌아오게 해서 고맙다든지
특별한 감정조차 없어진 건 기억력이 나빠져서가 아니고
내 속사람이 변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새로운 소일거리에 빠져
지난 일 끄집어내 되씹어 볼 시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