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를 외치는 내 모습
작성자명 [박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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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02.06
2007-02-06 마가복음 (Mark) 11:1~11:11 호산나를 외치는 내 모습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엊그제 모 tv에서 방영한 시사 다큐멘터리 한 편을 관심 있게 보았다.
내용은, 90년 초부터 10 여 년 간 지속된 일본 버블 경제의 후유증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프로를 시청한 사람은 두 부류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부동산 버블의 붕괴가 주는 교훈에는 관심 없이
부동산 폭락으로 엄청난 빚쟁이가 된 과거 일본의 부동산 재벌을 보며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부동산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에
부동산이 없어서 느끼던 상대적 박탈감을 모처럼 해소한 나 같은 사람과
국가 경제를 염려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부동산이 많아서
우리나라가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요 근래 큐티 말씀에 몇 차례 언급된 내용 중에 부자에 관한 내용을 묵상하며
그 때마다 재물 없음이 위안이 되었는데, 재물이 없는 것은 무능한 것이고
낭비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안 하는 게 검소한 것이지
돈이 없어서 못 쓰는 사람이 검소한 척 하는 건, 영어 못하는 사람이 미국에 가서
입 닫고 과묵한 척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도 청빈한 생활을 하며 주님의 가르침대로
자신의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느라 자신에게 남은 재물이 없는 사람들과
세상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재물을 허비하고 가난해진 나 같은 사람은
구별되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그 프로를 보면서 부동산 없음으로 위안을 받은 내 모습은
오늘 본문의 예수님 앞뒤에서 호위하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예수님께 환호한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을 통하여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기복적인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구원자는 가장 높은 곳에 계셔야 한다고 외친 것 아닐까?
그들이 바라고 외친 것은 영적인 해방이 아니라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고대하는 기복적인 절규였을 것이다.
진정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현세의 당면 과제인 로마로부터의 해방이 그들에게는 중요했으리라.
그들의 욕구에 맞아떨어졌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며
나귀타고 죽음의 마지막 길을 가는 예수님을 좇는 그 많은 무리 중에서
오늘 아침 식탁에서도, 아내의 숟가락 잡은 손에 힘없음을 가슴 아파하며
자나 깨나 재물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나를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대하는
그래서 간절히 호산나를 외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