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폭포 속에서 혼절하다: 죽어도 안 들리나?
작성자명 [정우석]
댓글 0
날짜 2007.01.16
2006/12/24
둘째 주일 아침에 또 한차례 난리를 치렀습니다.
교회 갈 시간이 다가오니 공연히 안절부절 못하겠습니다.
닭 쳐다보는 독수리 눈들을 뜨고 재촉 하는 것 같아
노모와 동생에게 부아가 치밀기도 했습니다.
나 오늘 못 가, 내일 성탄절 예배나 나갈게
버럭 소리를 질러 보았으나
동생 놈은 꼼짝도 않고 내 코앞에 버티어 서있었습니다.
노모는 그저
두 아들 얼굴만 번갈아 바라보며 엉거주춤 서계셨습니다.
끌려가는 소처럼 퉁퉁 부어 차 안에 앉아있었습니다.
동생도 아무 얘길 않고 노모도 내내 조용히 계셨습니다.
머쓱했습니다.
슬그머니 창 밖을 내다보며 눈을 감았습니다.
주여, 기왕 가는 거 제발 귀나 확 뚫리게 하옵소서.
두어 번 더 그리 기도해보니 점점 간절해 졌습니다.
처음시간부터 쩌렁쩌렁 들리게 해주옵소서.
류화숙 전도사님이 반갑게 맞아 줍니다.
지난 봄에 목장예배 몇 번 나갔을 때
간절히 기도해 주시면서
아픔을 공동체 안에서 나누어야 살아날 수 있다고
그리 당부하셨는데 말 안 듣고 빠져나가
이렇듯 허우적대고 있으니 낯이 뜨겁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시작됩니다.
도널드 매클러 목사님께서
25년간의 목사 직과 신학대학 총장직에 감사하면서
신앙의 핵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설교하고 책도 써왔건만
자신의 자존감을 쌓아온 기초가 단순한 직업일 뿐 이었음을
그 직업을 잃고 난 후에 알게 되고
그제서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실체임을 깨달았다는 말씀에
갑자기 무엇에 두드려 맞은 듯
온 정신이 아찔해지는 게 아닙니까.
몇 차례 요동은 있었으나
큰 탈없이 살아온 25년 넘는 결혼 생활과
기가 막힌 자식들에게 무던히도 만족하며
남들은 이런 자식 하나만 있어도 복이라 할 텐데
복을 받아도 세배나 받았다고 큰소리 땅땅 치며 살아온 삶이
태평양 건너서 이월 어느날 밤 열시반에 날아든
천만 뜻밖의 전화 한 통으로 막을 내리고
나를 둘러싸있던 모든 세계가
일순간에 무대 위의 마술처럼 사라진 후에
끝도 없이 깊이 침잠해가는 나락 속에서
겨우 두 눈을 꿈쩍이며 무시로 다가오는 죽음만을 기다리다가
이제서야 주 앞에 엉금엉금 기어 나와 앉아있는
제가 선명히 보이질 않습니까.
왜 그리 안 들리느냐고
죽어도 안 들리느냐고 우뢰 같은 호통을 치십니다.
중학교 이 학년짜리한테도 잘 들리는 소리가
오십 먹어 그 꼴에 흰소리 치며 살아온 네게는
어찌 그리 안 들리느냐고 마구 질책하십니다.
혹여 네가 대제사장 흉내 내며 살아온 건 아니냐고
네가 교만한 장로의 권세 갖기를 흠모하며 살지 않았냐고
그 꼴에 남자라고 기득권층의 흉내는
그런대로 내고 살면서
주님께서 친히 부르신 당신의 목자들을
잡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치는
씻지 못할 악행을 저지르며 살지 않았냐고
벼락 같은 음성으로 나무라십니다.
가슴이 막힙니다. 목이 졸려옵니다.
오 주님, 예 저로소이다.
제가 그랬습니다.
눈물이 쏟아집니다.
회개하고 애통하는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
.
.
.
김양재 목사님이 늘 마땅치 않았습니다.
형수님의 동생이신 그분의 서울음대 졸업연주회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습니다.
피아노치는 모습이 멋지긴 하다고 느꼈고
연주회 후에 같이 찍은 사진을 나중에 들여다보며
미소가 별로 없는 새촘한 모습이 예쁘긴 하다고 느꼈습니다.
15년 전쯤에 잠깐 귀국해있는 동안
폐암 말기의 사로 에서
고통 속에 절규하는 형님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명동 백병원의 외과 과장 선생이
정건일씨 수술 못합니다 거만스럽게 잘라 말한 후에
다행히 젊고 패기에 찬 세브란스 의사 선생의 집도로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병실에 누워있던 형님을 방문하니
김양재 집사님이 동료 교인 몇 분과 복도에 서계셨습니다.
형님은 침상에서
기도고 예배고 필요 없으니 사라지라고
병문안 온 처제에게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있었습니다.
김양재 집사님은 그러나 한줌 동요의 표정도 없이
일행들과 복도에 우뚝 서서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는 잘 몰랐으나
참 우리형님이 너무하시네 생각도 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싫다는 환자에게 극성 떠는
저 사람들이야말로 광신자들 아닌가 여겨졌습니다.
지난해 11월말에
큰딸 노을이가 연세대학원 스칼라로 유학 와 있을 때
무슨 공무원학원에서 영어강의를 맡아달라 간청도하고
오래 아팠던 몸이 나아가기 시작했으니
스물한 살짜리 딸 간수도 좀 해볼까 싶어
겸사겸사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형수님 댁에 머무르며
김양재 목사님 사역하시는 우리들교회에 안 나가기도 뭐해
몇 차례 들렸으나 제 마음엔 아직도 영 아니었습니다.
조카 애와 죽이 맞아 맥주 마셔가며
우리들교회 문제점에 대해 논하기도 해봤습니다.
제일 큰 고통은 김양재 목사님 말씀이
도무지 안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어정쩡한 김은중 목사님 뻔뻔해진 것 보고 용기얻다 (2)’ 에서 이미 고백 했습니다]
도대체 형수님은 자기 친동생을 뭐 그리
목사님 목사님하며 존경하며 따르며
그 말씀을 뭐 그리도 밤낮으로 사모하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
.
.
.
대제사장 흉내 내며 교만한 장로의 권세 얻기를 흠모하며
그 꼴에 남자라고 기득권층의 흉내 내고 살면서
주님께서 친히 쓰시는 경건한 주의 일꾼들을
잡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쳐온 네 이놈!
그러고도 주의 말씀이 들리기를 원하느냐 벼락 같이 질책하시며
이 주일 아침에
수십 년간 제 속에 꽁꽁 숨어 교묘히 운신하던
귀신의 정체를 보여 주시기 시작합니다.
.
.
.
.
***수없이 겪으시고 헤쳐오신 많은 성도님들께는 별게 아닌 오픈 이겠으나, 제겐 제 영의 뼈를 깎는 힘든 고백들 입니다. 예수님께 약속 드렸으니 계속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