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눅9;28-36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후 7일지나 8일째 다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십니다. 이시기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참으로 힘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힘든시기에는 기도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다가올 십자가가 너무 힘드셨을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창세이래 최대의 사건입니다. 예수님, 모세, 엘리야는 십자가 죽음을 얘기했다고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나는 영광과 모세,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위로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 상황에서도 베드로와 제자들은 육신이 곤하여 졸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는 심각한 얘기를 하는데 베드로는 여기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자고 합니다. 나도 그랬을 것입니다. 복음은 장차 받을 환란이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꾸 죽을 것을 말씀하시는 현실이 싫었는데 잠시 졸고나니 영광이 보입니다. 또 능력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보입니다.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죽지않게 해달라고 붙잡고 매달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보다도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이 너무 암담하고 싫어서 지금 눈에 보이는 영광을 놓치지 않고 잡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는 미래의 암울한 예측을 하기 싫습니다. 베드로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장차받을 환란이 너무 싫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기들 곁을 떠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그 누가 자신이 사랑하고 목숨바쳐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그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겠습니까? 일주일전에도 말씀하셔서 들었는데 오늘은 모세와 엘리야까지 와서 그 듣기 싫은 얘기를 또 들으니 그마음이 오죽이나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배드로는 안되는 줄 알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행동을 한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인것이라 생각됩니다.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나는 그영광으로 하시는 말씀이니 인정하고 싶지않아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으로는 부인하고 안된다고 외치고 싶겠지만 참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가슴 찢어지는 베드로의 마음이 오늘은 나를 울립니다.
나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저들이 말씀을 모르고 예수님을 외면하면 죽음밖에 없는데도 나는 가끔씩만 애통합니다. 베드로의 찢어지는 아픈 가슴처럼 저들의 구원에 대한 애통함과 절절함이 부족하니 목을 놓고 기도도 못합니다. 베드로처럼 정신없는 헛소리도 못하고 약점 안잡히고 체면 안구기려고 점잖게 하려고 합니다. 가족구원에 대해 방관자 같습니다. 내 환경이라면 ‘제발 내말 한번만 들어달라’고 애끓는 하소연을 할만도 한데, 어찌합니까? 나는 왜 이 모양인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베드로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습니다. 위로의 그름이고 약속의 구름이지만 스승의 거듭된 죽음의 예고에 베드로와 제자들은 무서운 것입니다. 이제는 무슨일이 일어나도 사랑하는 스승을 빼앗길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이마음을 위로하고 잠잠케할 것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무섭고 흔들릴수도 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이었지만 이 말씀으로 잠잠하여지고 인봉합니다. 아직은 함부로 전파될 사건이 아니었기에......
주님.
오늘은 스승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두렵고 떨리고 정신없는 베드로를 봅니다.
소현이 민지 민서도 같이 천국가야 하는데 죄인은 애통한 마음이 부족하고 절절한 마음이 없습니다.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나의 할 바를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