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에게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세리들중에 레위는 좀 다르게 자신이 늘 죄인이라고 생각하던중 예수를 만난것 같습니다. 일제시대 앞잡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들도 모두 나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레위는 나를 좇으라는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좇을 수있었습니다. 앞서 베드로도 야고보도 요한도 그랬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의와 교양으로 교회생활하는 사람은 예수가 필요없을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그랬습니다. 예배하고 성경보고 기도하지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나는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병들어 힘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예수가 필요 없었습니다. 교회다니는 것을 취미삼아 일종의 문화생활처럼 다녔습니다. 절실함이나 간절함은 눈씻고 찾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병이 없다고 잘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깨닫는 자들을 불러 회개 시키러 오셨다고 합니다. 회개는 죄에대해 형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즐거움과 기쁨의 잔치같은 것이라는 것을 오늘 알았습니다. 레위가 다른 죄인들과 예수님과 큰 잔치를 합니다. 회개는 주님과 함께 거하고 주님과 함께 누리고 충만한 것이고,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잔치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같은 자의 죄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아파하는 것이고, 진정한 의미의 금식의 고통을 맛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새옷과 헌옷을 구분하여 헌옷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새옷을 받았는데 헌옷에 미련이 남아서 버리지 못하고 새옷과 겸하여 붙여서 입어보려고 애쓰는 나를 보게됩니다. 헌옷을 버리지 못하고 과감하게 포기하지 못하고 새옷과 같이 입어보려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합니다. 나의 헌옷은 재물욕심, 세상 명예와 인정, 어쩌다 올라오는 음란, 높아지려는 마음, 더 잘먹고 잘살려는 마음들입니다. 이런것들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하고 새옷에 덧대어 기워 입으려고하니 새옷마저 상합니다. 헌옷을 버리지 못하고 구석에 박아 놓았다가 나의 욕심과 음란이 올라올때 꺼내놓고 위안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따금씩 얼마 안되는 돈을 계산하며 미래를 걱정하고 계획하는 세리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명작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저장해놓은 동영상을 옷장 구석에 박아놓고 1년에 한두번씩 보게됩니다. 이정도 쯤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헌옷을 새옷에 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새옷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찢어집니다. 헌옷을 버리는 것이 새옷을 입고 사는 길인데 알면서도 못하는 나는 나약한 죄인입니다. 아주 버려야하겠습니다.
아직도 약하게나마 과거에 친구들과 밤문화를 즐기며 잘나간다고 할 때가 생각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때의 묵은 포도주가 좋은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 새 포도주의 가치와 비교할수도 없습니다. 지금 새포도주의 말씀을 날마다 새롭게 받고 있는데 부대가 문제입니다. 아직도 낡은 부대가 몇 개 남아있는 것같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보고 깨달아도 샐 때가 있고 터질때가 있습니다. 적용하는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새지도 터지지도 않게 잘 담아서 그 말씀대로 사는 것까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 포도주의 인생을 살아 갈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회개는 예수님을 만나서 기쁜 것이고 즐거운 것이고 잔치하는 것이지만
주님의 십자가와 나의 죄를 생각하면 애통이 됩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주신 새 옷을 입고 새 부대가 되어
옛 습관과 옛 세상 즐거움을 버리고 새 포도주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