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갈 국립 공원
작성자명 [김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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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11.21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물이 여호와의
언약궤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때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하라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려 하심이라 하라
(수 4:6~7,24)
두렵고 떨리는 맘으로 나눔을 올립니다.
전 결정적일때 항상 자존감이 낮아지고..주눅드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 이렇게 용기를 내어 봅니다.
전 아주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막내 딸로 표현이 없으신 부모님이셨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랐습니다.
어릴적부터 유난히 승부욕이 강하고 시기심이 많아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처해 걸었던것 같습니다.
5살 때 무용을 첨 배울때도
한시간 전부터 한복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무용학원에서 진(?)을 치고 있었고
학교도 7살 때 같이 놀던 동네 8살친구들이 다 학교에 가자
엄마에게 떼를 써 동사무소에 청탁을 넣어 조기 입학을 했으며...
입학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한글을 배우느라
새벽4시에 일어나 집앞마당을 쓸고 난후 예습을 하고...
받아쓰기 시험을 보는데 생각나지 않는 글자가 있어
시험보는 중에 마냥 억울해 울고 있음 선생님이
몰래 제 책상에 정답을 써 주시기도 했습니다
6년 내내 성적표엔 “샘이 많고...”가 적혀 있었으니..
양편 갈라 시합을 할때 선생님이 다른 편에서 뛰신날이면
그날은.. 내내 선생님은 절 달래야 하셨습니다
교회는 5살 때 첨 나갔는데..
어떻게 가게 되었는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아뭍든 사탕이나 빵뭐 그런걸 받으러 간거 같습니다
교회가 불이 나 천막치고 예밸 드리는 교회였는데
앉아서 드리는 예배라 방석중에 가장 예쁘고 쾌적한 방석을
차지하기 위해 젤 먼저 가있곤 했답니다^^
그러다 이살가고
초2학년때 옆집 친구에 의해 성인이 되기전까지 다녔던
교회에 전도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년 친구들은 아빠가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모두들 그런데 저의 가정만 홀로 믿지 않는 가정이어서
너무나도 열등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교회선 항상 찬양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앞에 서는 일이 많아
집사님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뉘집 딸인가?”하시는 말씀이
제겐 가시처럼 박혔고 어린 맘에 상처가 되었습니다.
장로님딸이었던 친구의 권유로 5학년때 K.B.S어린이 합창단 시험을봤는데.
3차까지의 보는시험중에도 저희 부모님은 아무런 힘도 실어주시지 않으셨고
저혼자 모든 일을 감당해야 했는데, 라디오로 합격자 발표를했는데,
제 이름이 발표되자 함꼐 기뻐(?)는 해주셨습니다ㅠㅠ
그 이후 저는 삶이 고난이었습니다.
학교수업을 빠져가며 녹활 하려 다녀야했고 빠지는 수업을 스스로 공부해야 했으며
집에서 1시간 반 거리인 방송국을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멀미가 너무 심해
방송국 로비에서 꼭 한번씩 구토를 해고 탈진 된 상태로 연습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또 그시기에 친구의 피아노치는게 너무 샘이나 엄말 졸라 피아노학원에 등록해
아침7시에 학원가서 문두드려 파아노 치고(그것도 1년만에 속성으로 체르니 30번까지
치게 #46124;는데, 선생님도 제 등살에 왠만하면 넘겨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학교갔다 방송국 갔다.... 그 힘든 일의 반복을 누가 시켜서도 아닌 스스로를 들볶으며
그렇게 어린 나이에 고되게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 이후 장로님딸이 예중 입학원서를 가지고 와서 쓰라길래
(지금 생각해보니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던것 같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지원해
겁도 없이 아무런 준비하지 않고 시험을 봤는데...덜컥 붙어버려
할수 없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예중을 다니기 시작했고
그 다음 예고에, 음악대학까지 이어졌습니다
목사님께서도 항상 혼자 스스로 해나가셔야만 했다고 하셨는데....
저의 음악도의 길은 이미 예상했듯이 그야말로 저혼자 헤쳐가야하는 길이었습니다ㅠㅠ
합창단 시절, 여의도근처에 사는 애들은 엄마의 치맛바람으로 PD들과결탁해
노래는 다른애들이 녹음하고 녹화는 그 애들이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 했으며,
예중, 예고를 다니면서는 다행이 재주가 있어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고 장학금을 받고 다녀
무실 당하지는 않았었지만 저 스스론 부모의 뒷받침없는 그 빈틈때문에
항상 자만심을 가장한 열등감으로 똘똘뭉쳐 있었던거 같습니다.
고 1 때 교회에서 무리하게 성댈 혹사 한후 폴립이 생기는
제 인생에 첫 번째 큰 고난이 왔습니다.
학교를 격일로 빠져가며 치료를 받아야 했고
레슨도, 시험도 치르지 못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어쩜 노랠 못하게 될지 모르겠다고도 하셨는데
청천벽력과도 같았습니다
그#46468;부터 전..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고쳐달라고..그럼 평생 주님을 찬양하며 살겠다고..
그후, 하나님이 속아주셔서(?)
치유가 #46124;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도 입학했습니다.
절 가르치셨던 교수님도
그때까지도 한번도 얼굴을 보이시지 않으시는
부모님을 비꼬시며 “참 너, 장하다”하셨습니다
그말도 제겐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의 어린 시절은..
스스로를 위로해야했으며 스스로 자존감을 높여가며 살아야만 했었기에
너무나 많은 힘을 주고 사는 지금의 제가 형성되었던 계기가 된것 같습니다.
대학 입학 후 ,
어릴적부터 타고난 잔머리(?)를 굴려보니
더 이상은 부모님 도움없인 않되겠단 판단이 들어서
“박수칠때 떠나자”라는 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장속에 보호된듯한 음대 분위기가 난 너무도 싫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그렇게 포장해 나갔습니다.
고등학교때,서원했던 일은 새까맣게 잊었지만
그때 즈음 제 안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맘이 강하게 용솟음쳤고
기독써클을 기웃거리며 말씀에 갈급함을 채우려 열심을 냈지만
음대생이란 간판 때문에 그들이 제게 선입견을 갖고 있어거릴두고 대하기에
공동체에 깊이 들어가지도 못하는 즈음...
남편과의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은 내게 세상이 놀라는(?) 진실함으로 충실했고
(연애하는 6년동안 내내 자기 집을 지나쳐 저의 집까지 바래다 주지
않은 날이 없었고 그 흔한 미팅한번 하지 않았으며 같은 과여자친구들에겐
매정하게 대하면서도 오직 제게만 항상 최고의 여자로 대우해주는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저의 작은 배신(?)에도 항상 너그러웠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구요...)
모든 것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환경과 인품, 용모(주관적임^^)을 갖췄기에
현모양처의 목표로 바꿔타기에 충분한 당위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을 통해 나의 음악을 성취할 수 있고
무었보다도 행복해 보이는부모님과 가정이 있었기에
제가 그동안 꿈꿔온 나의 반쪽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남편의 가정은 불신가정이었고,
남편은 중3때 사촌누이 전도로 집근처 교회에 다니며
중창단을 하는 기쁨으로 교횔 다니는 수준이었습니다만,
제겐 그리 큰 문제가 않#46124;습니다.
그저 그와 함께면 나는 행복할수 있겠단 생각뿐이었습니다
그후 급기야 전 자랐던 본교횔(공동체) 떠나
남편과 함께 쏠리스트로 이교회 저교회로 돈벌러 다니는
영적무감각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시절 내내 연애 후, 우린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결혼은 생각지도 못한때 하게 되었습니다.
시아버님의 급성위암으로 우린 부랴부랴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행복만을 위해 내달렸던 저의 결혼의 꿈은 산산 조각이 났습니다
결혼후 3개월 뒤 아버님 상을 당했는데...
남편은 매일 괴로워 술먹고 차에서 자고 외박하는 일이 매일이었고
시어머님은 시도때도 없이 우시고
두 아들을 어머님이 우시면 싸이렌을 입으로 불곤
시동생과 남편이 어머니 앞에서 산토끼를 무용과 함께 부르며
어머님을 웃겨드리면 어머님은 언제 우셨냐는듯 깔깔거리며 웃으셨고
워낙 소녀적인 목소리에 외모도 교양도 받쳐주셔서 입만 여시면
시가 나오시는데.. 어느날은 차를 타고 가시다 창밖을 쳐다보며
예전에 그리도 아름답던 꽃들이 이제는 나를 향해 흐느껴 운다 하시며
한숨을 토해내셔서 두아들의 맘을 절절히 울리기도 하셨습니다.
한동안은 거실에 이불을 깔고 시동생 남편시어머니 저 이렇게 누워 자기도 했고,
어머니 적적하다며 시동생과 남편 번갈아 어머님과 잠을 자자고 두형제가
순번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의 외박에도 한번 탓하시는 법없이 차 문열고 자라고만 하시고
그저 절 제외한 당신식구들의 슬픔만을 강조하며 저의 고난은 행복한 투정취급했기에
정말 죽고만 싶었습니다.
어머님은 워낙 유명한 공주과시고 아버님 돌아가신후엔 왕비(?)가 되셔셔서
24살 갓 시집온 새댁인 제가 삼시세끼 식사 준비는 모두 제 몫이 되었고 ,
남편 손님치룰땐 언제든 어머님은 항상 주인공이되셔서 인사다 받으시고
전 무수리역할만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부글거리는맘을 주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 그 나이때도 요리을 곧잘했고 일처리에 유능했기에 주도하고 싶지
뒤치다꺼리하는건 질색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전에 그렇게 좋아 보였던 화목한 분위기는그들만 똘똘 뭉쳐 절 소외시키는데 사용되어졌고
맘하나 써주지 않는 식구들을 보며 내 자신이 이집 식모지 식구가 아니구나라는
피해 의식에 사로 잡혀 매일을 눈물로 지냈습니다.
제가 시집올때 어머님의 연세는 51세셨는데, 외적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다 인정받으셨고
숨넘어가시게 우시다가도 볼만 대시면 언제 그랬냐는듯 어린아이와 같이 단잠에 빠져드시는
복(?)도 받으셨기에 건강또한 타고 나셨습니다.
거기에다 받쳐주는 효자 아들이 둘이나 되시고..
그 옆의 가면 전 이상한 기운에 눌려 항상 초라하게 느껴졌었는데...
이상하게도 어머님은 그런 제게 라이벌의식이 있으셔서 그것이 또 절 힘들게 하였습니다
지나보니 어머님은 당신밖에 모르시던 아버님의사랑도 받으셨고
(아버님댁 가계는 항상 이상하리만큼 부인들이 단명하는 집이었습니다. )
두 아들도 끔찍이 엄말 위하는데, 며느리라는게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손아귀에 잡히지도 않으니 얼마나 못마땅하셨을지..그맘이 체휼됩니다.ㅠㅠ.
남편은 그런 와중에서도 제게 알수없는 원망만 하고 있었고,
(남편은 제가 아버님의회복을 위해 진심어린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데 원망이 있었기에
저의 어떤 행위도 고마워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46472; 전 믿음도 없었고
너무나 어렸고 시집와 바꿔진 환경에 적응하는것이 급선무였지
부모를 떠나 보낸 남편의 심중은 헤아리질 못했던거 같습니다.)
어머님의 치우치신 자식사랑은 항상 세상의 주인공이였던 절 서서히 죽게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않들어오는 날이면 베란다 창 밖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도
수도 없이 일어났습니다.그래서 정신과도 찾아다녔죠.
그땐 몰랐습니다. 왜 이런 환경으로 절 몰아 가시는지를...
항상 시간을 쪼개서 종종걸음을 치는 절 전혀 도와주시기는커녕 더 심한
요구들만 늘어놓셔서 절 기염케 했으며 밤늦게 일하고 파김치가 돼서
들어오면 절 맞는 건 가기전 상쳐려 놓은 그대로의 상태에 빈밥그릇에
밥풀이 말라붙은채로 그냥 나뒹굴고 있는 상이었습니다
거실은 온통 쓰레기통화 되어있고...
그것을 치우면서 정말 제 속에선 너무나도 죄악된 생각들만 치고 올라왔습니다.
제가 가장 참을수 없었던 것은 4살난 손자의 밥도 않챙겨주셔서서
그 아들이 씽크대를 기어 올라가 밥솥을 열고 김치랑 퍼 먹더란 소릴 웃어가시며 하시는데....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유학중,큰아이가 7살이었을때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는데.(첫아이 임신때도
저보고 아이못가져 환장한 애처럼 애부터 갖냐시며 할머니소릴 듣기싫으니
“머니”라고 부르게 하라 하셨는데...)
저의 임신소식에 “ 유학갔으면 공부나 할것이지 행복하게 살려 갔냐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시며 수술하길 원하셨습니다. 근데 남편이 결단으로 아들을 낳게 되었으나
그 아들을 이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같이 방을 쓰는 큰 딸아이만 편앨 하시는데
제 머리론 이해가 않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두 아이를 가지고 대놓고
편가르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어머님은 두아이다 아들 사주에 맞는 띠가
아니라 최상의 애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으셨다는걸 알았습니다.
참고로 저희 어머닌 인근 대형교회를 10년이상 출석하고 계십니다)
동창친구들은 우리의 이상한 가족관계를 보곤 넷이 손잡고 정신과
상담받으러 가라는 소릴 들을 정도로 정말 뒤틀린 가족이었습니다
그렇게 장가 않간 시동생까지 6식구가 한집에 살면서
서로를 할퀴고 살아갔는데....
유학을 다녀온 후 저희에게 모든 살림을 책임지라하셨는데
불규칙한 수입 때문에 생활이 제대로 돌아가지않는 와중에도
시동생에게 생활비 한푼 내놓지 못하게 하시는 어머님의 행동보다도
더 참을수 없었던것은 시동생과 남편을 비교하며 남편을 한심한 사람으로
몰아 부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동생도 아이들 앞에서 형을 나무라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고...
정말 남편이 한가정의 가장으로썬 도무지 받지않아야될 대우를 받고 살고 있었습니다.
저또한 남편의 의존성에 너무도 실망해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뜻도 모르고 당하기엔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손을 대시기 전까진 이것이 저의 십자가려니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술먹고 친구만나고 않들어 오는 일이 근 1년이 되어갔는데..
그래도 전 인정 받았던 사람이 오죽 힘들면 저럴까 싶고
집이 싫기도 하겠다는 생각에 아무런 기미도 못차리고 있던중이었는데...
남편으로부터 기가 막힌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여자가 생겼고 심각한 관계라 곧 집을 나갈것이라고..
참으로 땅이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내 남편이...
아니 어떻게 이렇게 사는 내게.... 정말 시간이 멈춰지고 나의 세상은
끝났구나 싶었습니다. 둘이 부여잡고 엉엉 울었습니다.
사실 남편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게끔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 무인도에 다른 여자와 단둘이 있어도
저에대한 정절을 지킬 사람처럼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었기에..
도무지 그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나의 굳건한 자아가 날 흔들어 #44704;우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우상은 바로 괜찮아 보이는 내 자신이기에 그에 걸맞는 남편과 자녀가 있어야 하는데...
남편은 지금 내게 맘이 떠났더라도 아이들을 이라도
지켜내야 하겠기에 절대 이혼은 않된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이성을 되찾고 남편에게 난 이혼할 맘 없다. 당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가정에서 세움을 받지 못해서 그런 상황에 놓인것 뿐이니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나가면 들어오는건 어려우니 힘들어도 집에 그냥 있어달라.
(사실 이땐 이미 그 여잔 남편과 만난지 3달 만에 먼저 이혼하고 나와서 아이들을
갈라 기르고 있었고, 남편이 결단을 내려주길 8개월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사랑의 상처가 많은 그 여잔 그것을 치유해 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이라며
남편을 신처럼 받들어 준다고 했습니다)고 했더니 그럴수 없다고 제가 진정되는데로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가르쳤던 제자의 학부모로 알고 지내던 목사님 사모님이 계셨는데
공동체 생활을 이끄시고 말씀이 삶으로 내려오신 분이라 생각되어 그분께 상황을 얘기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분은 당신일처럼 절 도왔지만..
지나와보니,십자가 지기 보단 인본주의적으로 절 보호하려 하시고, 그래서
어떻하면 상처 받지않고 사건의 해결을 보게 할까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말씀으로 보호되지 않았던 그 시기의 기억들은 고스라니 제게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 시기에 삼자 대면이 있었는데.. 그때 놀라 자빠질 만한 온유함으로 대처했기에 남편이 곧나겠다는 말을 철회하게 되었고 다시 한번 그여잘 지켜보겠다고 하게 되었으나 말씀으로 보호되지 않은채 만났던 그만남은 지금까지 제게 상처는 아물었지만 그 흔적은 남게 하였습니다)
그러던중, 얼마전 ,고난이 있어서 목사님 큐티 모임을 통해 해석받고 살아난 경험이 있는 아들 친구엄마로부터 전해 받은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의 저자인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살려달라는 메일을 보내게 되었고 전활통해 전도사님과
연결, 그후 이 효숙 목자님과 드디어 연결이 되었던 것입니다.(짜자잔, 짜~안^^)
일주일을 거의 예배로 도배하다시피 죽기 살기로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그때도 격일로 그집을 가서 자고 오는 일을 했는데,,
처방에 따라 끊임없는 섬김으로 그 여잘 만나러 가는데 다림질해서 깨끗이
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