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랄 수 없는 중에**
작성자명 [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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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9.08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나이 백 세에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았고, 아내 사라도 경수가 끊어진 지 오래였지만 그는 말씀을 믿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래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 수 있었다.
오늘 큐티본문 ((로마서 4장 13-25절))을 묵상하면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아브라함을 생각한다.
모르는 게 아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게 잘 안된다.
많은 방해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합리적, 상식적인 생각들이 자꾸 가로막는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을 비웃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을 손가락질 한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은연중에 신앙도 믿음도 과학적, 합리적, 그리고 상식적인 범위안에서 가지려고 한다.
그것이 고상하고 우아하고 젠틀한 신앙인것처럼 생각을 한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담을 뛰어넘으라는 명령을 듣는다.
과학적인 틀, 합리적인 사고, 상식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면 믿음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되지 못한다는 경고의 음성을 듣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각난다.
그들 역시 그랬다.
산더미만한 파도가 밀려올 땐, 예수님이 옆에 계셔도 불안해했다.
그들 눈엔 파도만 보였던 때문이다.
옆에 함께 계시는 예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파도밖에 보지 못했었다.
바다에서 뿐이 아니다.
들판에서도 떡이 부족할 때도 그랬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방법을 알지 못하고 산수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낙담하고 불안해했다.
과학을 뛰어넘기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생각을 믿음의 눈으로 넘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성경은 그것을 이미 제자들의 실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현실이 그렇다 해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사람들이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오늘 로마서에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쳐주신다.
세상사람들은 바랄 수 있는 것만을 바라는 사람들이다.
믿을 수 있는 것만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너와 나는 다르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려내신 하나님.
광야에 길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생기게 하시는 하나님.
큰 바다에 대로가 생기고, 큰 강에 첩경이 생기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는다.
그래서 오늘 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기도를 드린다.
믿을 수 없는 중에 믿는 기도를 드린다.
아브라함이 그랬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그래서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기적을 보는 사람들이다.
매일매일 기적을 보며, 기적을 누리며 또 기적을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은 일들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에게 그러셨듯 우리의 아버지는 오늘 또 우리에게 기적을 행해주시는 분이심을 믿는다.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사람.
과학적인 세상에 살지만 과학의 틀에만 묶이지 않는 사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를 가져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얼마나 신비한지 모른다.
그런 놀라운 신분을 허락하신 아버지께 다시 한번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금욜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