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무지한 자입니다.
작성자명 [송재호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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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8.27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저 또한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존재했던 동의할 수 없음, 소통의 불가함에 대한 고난이 있습니다. 아내, 최근에는 아들, 가끔은 교회의 지체들 사이에 있는, ‘다름의 인정’이 고난이 되고 있습니다. ‘다름’에 대해서 인정을 해도 고난이 되고, 하지 않아도 고난이 되고 있습니다.
아내와의 고난은 소통의 한계에서 기인합니다. 이해할 수 없음에서 시작됩니다.
최근에, 아내의 부탁과 공중질서를 지키는 것에서, 질서를 택한 것으로 아내의 원망을 사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심하게 화를 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에게 화내는 것에 대한 이유를 질문했습니다. 거부를 당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이런저런 원성들의 조합을 통해 그 이유가 될 만한 사실을 추리해 보았습니다.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배려한 것이 아내에 대한 배려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내에 대한 배려와 의로움에 대한 가치는 충돌했으며, 나의 공중에 대한 배려와 의로움은 일치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습니다. 아내에게, 나는 공중에 대한 배려와 의로움을 택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화를 표출하기 싫어서, 또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겨우 아내의 이유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이었으며, 심한 표현들이 뒤따랐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폭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상대를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려는 언행은 악하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저도 화가 난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갈등을 해소하려던 나의 의도는 처참하게 왜곡되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지체들에게 털어 놓았습니다. 아내와 남편은 원래 다르다는 의견들이었습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라는 조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름에 대한 인정은 여전히 의로움과 충돌했으며, 선함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가치 하향적이었습니다. 적어도 제 기준에는.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고난이 되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늦은 밤에, 방학 동안 기른 머리를 다시 단정하게 자르지 않으면 학교에서 벌을 받게 되니, 머리를 잘라달라는 아들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장시간 동안, 머리를 잘라주었습니다. 가위에 손을 다쳐가면서. 다음 날 아침, 아들의 험악한 인상을 대면했습니다. 황당했습니다. 왜 화를 내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 인터넷의 페이지에 직접 원고를 작성하다가 작업한 내용이 소멸된 경험이 있던 아들이 또 다시 인터넷에서 직접 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작업 방식의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문서로 먼저 작성한 후, 인터넷에 첨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여전히, 아들은 짜증을 부리는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이유를 질문했지만,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춘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아내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아내이기 때문에, 사춘기이기 때문에, 덥기 때문에, 급하기 때문에, 그냥, 이유 없이 등등의 이유로 화를 내는 것이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덧, 나의 가족들이 동의할 수 없는 화를, 이유를 알 수 없는 화를 내는 것이 제 고난이 되었습니다. 또한, 가족들의 그러한 성품을 다름으로 인정하고 싶지만, 객관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므로 인정을 하고 싶지 않음이 제 고난이 되었습니다. 공동체에서도 그러한 다름에 대한 인정을 계속해서 조언하니, 고난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상태를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치우친 것에 대해서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세련된 것과 멋스러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투박하고 꾸미지 않은 것이 나쁘다고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정교한 것과 치밀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우연히 조성된 것의 가치를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디자인된 것과 갖추어진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구현된 것을 폄하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지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무지한 것과 통상적인 것을 욕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문화적 환경에 놓이는 것과 문화적인 상황을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비문화적이라고 한정하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정직한 것과 솔직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선의의 거짓말을 존중합니다. 저는 한결같음과 균형을 갖춘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격정적임과 열정적임의 매력도 좋아합니다.
이렇게 좋아함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타인과 마찰이 생기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마찰이나 갈등은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에서 시작됨을 알고, 또 그렇게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그런 것들을 누리게 되면, 더 편하고, 더 좋다고 제 느낌을 표현합니다. 그것은 가족들과 지체들과 함께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억지가 된다면, 싫은 것이 된다면, 양보합니다. 그럼에도, 정확히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각자의 다름을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럼으로써, 충돌은 피하고, 마찰은 제거하고, 갈등은 해소하자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또한 고난입니다. 저는 타인의 기호와 누림과 가치를 인정하는데, 오히려, 나에게는 나의 것들을 일방적으로 양보하거나 버리는 희생을 강요하는 조언처럼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릇된 것도 아니고, 우상도 아닌데. 오히려 상대의 것이 옳지 않고, 우상과 같은 것인데도.
이유를 알고 싶음의 고난, 이해할 수 없음의 고난이 이렇게 날로 더해 가고 있는 저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바로 ‘나’라고. 그럼으로써,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치를 따지고 있는 제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그렇게 이치를 질문하면서 내세우던 나의 교만을 보게 하십니다. 이어서, 고난이 더해가자, 평행선을 긋던 가족, 지체들에 대해 싹터 오르던 미움의 감정을 보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질문을 하십니다. 창조의 때, 창조의 섭리, 창조의 질서에 관해서 질문을 하십니다. 제대로 답할 수 없습니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리임을 압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의 양육이 충실했었느냐고 질문을 하십니다.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대일 양육을 하면서, ‘씨 뿌리는 밭의 비유’의 훈련이 소홀했음을 발견합니다.
예목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과 ‘사랑하라’는 훈련도 부족했음을 발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밭이 되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가정생활이 될 수 있도록, 가정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지 못합니다.
사랑의 다양한 언어와 섬세한 묘사를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더불어, 15년 함께 살아 온 아내의 습성도 제대로 모르고, 14년 양육한 아들의 마음도 섬세하게 모르는 무지한 자였음을 발견합니다. 더욱이, 그들이 내 ‘마음-밭의 옥토화’를 위하여, 우리의 예수 믿는 가정생활을 구축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사랑의 언어가 그토록 다른 것을 체득케 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있음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였음을 발견합니다.
제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하나님께 고합니다.
주는 배려와 받는 배려가 일치할 때, 비로서, 배려가 생겨남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상처를 주는 나눔은 독이 됨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무리 성실하고 정확해도, 마음을 닫게 하는 나눔은 무용하다는 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눔의 기초에, 뜻의 통함보다, 생각의 일치보다, 마음의 문이 먼저 열려야 함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고난의 이유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유를 들을 수 없었던 제 무지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눔과 섬김의 기초가 겸손과 배려의 지혜에서 출발함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겸손과 지혜의 기도제목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