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를 다녀와서
작성자명 [이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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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8.18
나는 본래 유교전통으로 내려온 가문에서 자라나서 봉건주의 사상이 나를 지배했고 어느 종교 할것없이 자기가 믿는 신앙으로 착하게 살면 죄가 없는 줄 알았고 또, 유교에서도 모든 신앙은 다 다른것 같으나 끝에 가서는 다 목적이 같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러한 바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게 아니고 스스로 바르게 사느냐 하는것을 중대시 했다.
나는 일제시대의 우리 국민이 거의 다 핍박 받으며 나라없는 설움속에서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고 그 시절은 1940년대 전이었음으로 농촌에서는 농사를 자기 손으로 지었어도 좋은것은 일제에 다 바쳐야 했고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농촌에서 자라났고 또 그 시대에는 초등학교를 갈 만한 사람은 100호가 넘는 동네에서 5사람 가량이 겨우 학교를 다닐수 있은 그런 환경이었고 중.고등학교 과정이나 대학을 간다는 것은 한 군내에서도 몇명이 안 될 만큼 문맹시기에 적응해 가면서 독학으로 한문 공부를 밤을 세워가며 몇년 한 덕으로 17살 미만의 소년시절에 왠만한 책은 다 읽을수 있는 지식을 얻었다.
그러나 항상 머리에는 봉건사상의 지배를 받기에 유교 외에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고 모두가 외래종교로서 받아들일수 없는 강팍한 나 였었다.
또 우리 가문에는 그때까지 유교외의 다른종교는 가진일이 전무한 때였다.
1973년에 아들이 그 귀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에서 기숙생활을 하게 됨으로 그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아 교회를 나가게 되고 성경을 일찍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았는데 그가 우리 가문의 첫 열매가 되어 우선 부모인 나를 전도하기에 급급해서 만났을 때나, 별거하고 있을 때나, 서신으로 또는 대화로 애비의 구원을 위해서 자식된 도리를 다 하려는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면서도 워낙 굳어진 사상임으로 좀처럼 흔들리지 않으며 그러나 아들의 신앙에 반대하거나 만류할 생각은 전혀 없어서 나중에는 애비는 애비대로 정해진 길이 있다.
너는 믿는 하나님을 잘 믿고 성경에 약속된 복을 받거라. 이렇게 1982년까지 거절하고 미뤄왔다.
그러던 중에 내 나이 52세때 희귀한 병에 걸려 위험한 경지에 이르러 서울 국립의료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 워낙 위험한 병이었기에 죽음이 두려워서 전전긍긍 하던중에 아들이 출석하는 교회담임 목사님을 모시고 나의 병상에 와서 나의 구원과 치유를 위해 기도를 받은 일이 있는데 그때,
아!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했던 아들이 전하던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다음날 또 다음날 3번째 목사님의 기도에 내 마음에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그래 끝까지 고집할게 아니라 머리 좋은 아들이 왜 믿게 되었는지 그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고 찾아봐야 되겠다는 마음이 살아났다.
그때부터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내가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체험을 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 써왔다.
그 목사님에게 약속한대로 퇴원하면서 집으로 먼저 가지 않고 아들이 섬기던 교회로 먼저 발을 들여 놓았다.
그게 나의 신앙생활의 뿌리가 된 셈이다.
그 후로는 아들이 전도용으로, 생일선물로 주었던 성경책을 그제서야 펴 놓고 어떠한 책인지를 알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교회에 처음 출석 하자마자 믿음의 길에 서고 어떤 사람은 생전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이만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교회만 왔다갔다 하고 희미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오래 계속 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이왕이 시작한 것인데 속히 깨닫고 확실한 믿음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위시하여 수많은 신앙관련서적(간증문, 설교문, 예화문)을 거의 10년간 수도 없이 많은 저서를 탐독하면서 확신이 서기를 노력했다.
그러나 성경을 접하면 접할수록 내가 죄가 많아서 성령께서 속히 일깨워 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으로 조바심을 해야 했다.
그런중에도 어려운 수술을 받고 반신불수가 되었고 성대를 건드려서 목소리도 잘 안나와 고통을 받으면서 제일 처음에 기도드린것이 교회에 나가서 예배시간에 남들과 같이 찬송가를 옛 목청으로 시원하게 부를수 있는 은혜를 바랬다.
그런데 수술하고서 10년 가까이 되었는데 현재 나오는 음성정도를 낼수 있는데 까지 치유가 되었고 반신불수였던 불인한 반쪽 육신도 신경이 많이 되살아나 지금은 거의 불편없이 지낼수 있는 치유의 은혜를 받았다.
그러면서 아~ 믿고 기도하니 응답해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믿음을 바탕삼아 점점 열심히 말씀을 접하고 마음대로 삶에 적용 하려고 나름대로 쌓아 왔다.
그 즈음 부터는 출석하는 교회에서 지도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교회에서 내가 할 만한 사역도 분담시켜 주어서 나름대로 같은 성도들중에 믿음이 연약한자들을 내가 지도하는 일을 해 보았다.
170여개의 구역에 구역장, 권찰, 또 강사의 직분이 있는데 나에게 강사의 직분을 주셔서 알량한 믿음으로 성도들을 인도해 왔다.
대개 강사는 젊은층의 집사님이나 권사님들 중에서 거의 매년 바꾸어 가면서 일할 수 있게 하였는데 나의 구역만은 가장 늙은층의 남자로서 직분을 맡은자는 유일하게 나뿐이었다.
그것은 구역원들이 우리구역은 강사를 바꾸지 말아달는 간청에 의해서 내가 여러해 맡게 되었다.
다른구역에서는 구역모임이 한시간이내에 거의 끝을맺고 해산하는데 나의 구역만은 보통 3~4시간 가는때가 허다하였다.
원인은 내가 나이만큼의 인생경험을 가지고 내가 생각하는 성경의 적용과 삶의 현장에서 제일먼저 부부위주, 부모자식간의 중요함, 가정이 바로서야 교회도, 사회도 바로 선다는 신념으로 강론을 하면서 거의다 젊은 구역원이기 때문에 내가 부모된 입장에서 바르게 살려고 외치는데 듣는 이들은 그 외침을 싫어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어하는 그런 갈급한 심정을 알기에 더욱더 내 삶을 반추해서 그걸 교재로 삼아 구역예배를 인도 했기에 유명한 구역이 되기도 했다.
이제 막 말씀이 감사하고 은혜가 감사하고 나의 기도가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기도로 깨달아 지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왔다.
그러던 중에 몸에 또 고통이 주어졌다.
이 작고 깡마른 체구에 고혈압이 생기고 허리에는 디스크가 2mm 정도 돌출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병이 나를 짖눌렀다.
그때 즈음하여 출석하던 교회에서 목사님께서 우리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강한 훈련과제를 선포하셨다.
성경을 옮겨 쓰자는 운동이었는데 첫번째 시도인 만큼(1990년) 분량이 적은 신약성경(423page)을 연말까지 완필해서 전 교인이 제출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목사님께서도 그 바쁘신 중에 우리와 똑같이 시행하시겠다고 다짐을 하셨다.
그러므로 온 교인이 불꽃처럼 열성을 다 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나는 고혈압은 물론 허리 고통 때문에 한쪽팔을 딛고 한쪽팔로 글씨를 쓸만한 체력이 되지 못해 마음속으로 안타까워 마음졸였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으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했다.
2월에 시작해서 3월이 다 되었는데 매일 고심만하다가 한번은 아들이 이런 권유를 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는 아버지보다 더한 병도 고쳐주신다는것을 성경에서 보시지 않으셨읍니까.
의사는 못고쳐도 하나님은 고치실수가 있다는 믿음으로 실천해 보세요
그리고 제가 원하는 바는 아버지가 모필로 쓰시는 능력이 있으시니까 이왕 정성을 다해 쓰는 성경이니까 붓으로 써서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유산으로 생각하시고 써 보세요.
하는 아들의 신앙을 본 받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통증이 많지만 쓰다가 죽지는 않겠지 하는 믿음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어김없이 몸을 숙이고 한자한자 써 내려가는데 한줄도 못써서 고통이 심해지면 할수없이 멈추고 쉬었다가 시작하는데 그 때마다 기도로 이기기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또한 늘 쓰고 또 고통이 오면 하나님 내게 은혜 주시려면 다 안 고쳐줘도 괜찮습니다.
이 지시받은 성경을 완필할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고쳐 주세요 하는 기도를 수없이 올렸다.
그러면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점점 날이 갈수록 고통은 덜 느낄수 있는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서 깨달은 것은 어떤사람은 1년에 성경전서를 10독했다 20독했다 그런가 하면 30년을 교회에 출석했어도 마음에 드는 구절만 읽고 한번도 통독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내가 필사를 하다보니까 한줄쓰고 다음줄로 옮겨갈때 혹시 빠진데는 없나, 획이 잘 못된데는 없나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번 다시 읽고 또 한줄 쓰고는 두줄을 함께 읽고 또 반쯤 쓰고서 한번더 읽어보고 한페이지를 다 쓰고 나면 전부를 다시 읽어보고 하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원인은 요한계시록 22:18~19절이 두려워서 적어도 한페이지를 쓰는 동안 손으로 쓰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고 결국은 5~6독을 하게 되는 은혜에 잠겨 보았다.
이것을 깨닫고 계속 쓸때마다 기도하고 하는도중에 나도 모르게 허리에 통증이 매일 달라지고 고혈압약을 5년이나 복용했는데 두통도 점점 사라지는 것을 깨달았다.
약 3개월 백일정도 지나면서 허리에 디스크를 만져보니 돌출한것이 사라졌고 두통도 거의 사라져서 모두 회복되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를 치료하던 의사선생님께 현재 상태를 알렸더니 많이 좋아졌다면서 그렇다고 약을 일시에 끊으면 위험하다하니 매주 1번씩 나와서 체크해보고 복용약을 줄여가면서 약을 끊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이제 3개월이 지난후에는 붓으로 쓰는 글씨의 크기가 7mm각 안에 세필로 먹을 갈아가면서 백지에 쓰는 것인데 몸이 회복되니까 속도가 가해져서 하루에 넉장 다섯장씩 쓸수 있게 되었으며 혹 오자나 낙자가 있을까봐 발견되면 다 썼던 장도 버리고 다시 고쳐 쓰게 되니 버리는 양이나 바르게 쓴 양이 거의 같을만큼 많은 종이를 허비해 가며 #50043;는데 남들은 보통노트에 볼펜이나 연필등으로 쓰는데도 아직도 못다 썼다는 7월달에 나는 신약성경을 완필했다.
그런데 책을 매서 다시 검사를 해 가면서 정독을 하던중에 내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통신수단이 좋지 않아 편지를 많이 썼는데 괘지에 한장 아니면 두장 쓰는것도 처음에는 정중하고 깨끗하게 자기 솜씨로 써 나가다가 중간쯤되면 차츰 갈겨쓰기 시작해서 끝에 가서는 보기 흉할만큼 글씨가 흐트러지는 것인데 내가 쓴 그것도 분으로 쓴 신약전서는 마태복음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어디가 먼저쓰고 나중에 쓴 것인지 분별할수 없을만큼 일정하였다는데에 놀랐다.
이것은 오직 성령님의 인도가 아니고서는 되지 못할 일이다.
하루도 아니고 열흘도 아니고 약 5개월을 거쳐 하루에도 수없이 여러번 앉았다 일어났다 들락날락 하면서 자세가 그때그때 일정하지 않은데도 완필한 책을 보니 정말 내가 쓴것 같지 않았다. 이 성경을 옮겨 쓰면서 허리디스크가 고혈압이 지금까지도 다시 재발하지 않고 완치됨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도를 받아주셔서 친히 치료해 주신줄 믿는다.
그 후에도 기도에 자신이 생겨서 조금만 답답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를 위해 자녀를 위해 가족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많은 기도가 응답되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재미있고 열심으로 해 왔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서울에 도서출판사가 처음 시도하고 주최한 신약성경 옮겨쓰기 경진대회를 하면서 전국 교회로 광고 하기를 많이 응모하라는 포스터와 각종 선전물이 우리 교회에 배부 되었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미리 시작을 해서 그 대회에 많이 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서 그해 연말에 심사 결과 그렇게 고통스러운 몸으로 힘겹게 쓴 나의 필사본이 전국에서 2등에 뽑히게 되는 영광을 체험했다.
그로인해 기독교 방송국에서 새롭게 하소서 프로에 출연하여 간증하라는 요청에 의해서 전파를 통해 간증하게 되었고 또 여러 교회에서 초청해서 많은 간증도 했다.
후에 욕심이 생겨서 이왕이면 구약전서(1331page)도 모두 완필해서 신.구약전서를 완필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이제 구약전서를 옮겨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약전서를 쓰기 시작해서 나에게는 또 한번 더 큰 고난이 앞을 가로 막았다.
내자가 1991년 1월 31일에 갑상선암을 제 1차로 수술하여 내가 항상 가까이에서 도와주어야 하는 형편에 처했다.
물론 자녀들이 다 은혜가운데서 자라 극진히 공궤하지만 부부간에는 못할일이 없지만 자녀, 자부, 사위는 남편만큼 스스럼없이 도웁지 못할일이 많이 있다.
돌이켜 보면 나같이 초등학교가 나의 학벌이고 연약하고 못배운 탓에 능력도 없는 남편을 남편으로 대접하며 조선의 아내로써 가장 사랑을 많이 나누었던 아내인데 이제 자식들을 다 짝을 지어주고 가진것은 없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고 믿고 싶었는데 아내가 일반 질병이 아니고 누구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는 암으로 수술을 받게 되니 이제부터는 나의 모든 목표, 욕심, 나만의 편안 다 내려놓고 어떻게 하든지 아내가 고통을 덜 받고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마음이 평안하도록 도우려고 다짐했다.
그래도 이것만은 어려운 중에도 완성해 보겠다는 의지로 항상 아내의 침상 곁에 책상을 마주 해 놓고 앉을 틈만 있으면 붓을들고 구약전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들은 풍월로 무슨 암이든지 한번 수술하고 5년이 경과되면 거의 안심된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자에게도 그런말이 맞아들었는지 거의 5년동안 1주에 한번, 2주에 한번 나중에는 1개월에 한번, 2개월에 한번 이렇게 5년을 버티며 먹고 소화시키고 하는데 별 지장없이 잘도 견디어 오다가 5년 되던해에 재발되었는데 이번에는 너무나 위험한데까지 전이가 되어서 양쪽 귀 밑에서 부터 목을 전부 절개하고 식도와 기도를 꺼내서 식도는 식도대로 음식물만 넘어갈수 있게 만들고 기도는 기도대로 갈라서 목에 숨쉴 구멍을 만들어 연결시켜서 숨을 쉴수 있게 만들었다.
엄청난 장애자로 입에서는 헛바람이 나서 언어가 안되고 기도로 뚫어놓은 구멍에는 물이 들어가던지, 땀이 흘러가던지, 이물질이 날아 들어가 던지하면 견디지 못하게 고통스러워서 목에는 단 1분도 떼지 못하고 가리개를 만들어서 차고 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음식물만 섭취할수 있고 성대까지 다 제거했기 때문에 발음이 안되고 코는 기도를 목구멍에 연결했기 때문에 코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 고통스러운 삶이 앞을 가로 막았다.
그러니 한시도 아내 옆을 떠날수가 없어 24시간 한줄에 매여서 살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술직후 중환자실로 옮겨지는데 수술한 선생님 말씀이 4일동안 지내야 생사를 확인할수 있다고 한 정도 였었다.
그런데 아내는 나보다 16년 먼저 카톨릭 교회에서 영세를 받은 신앙인 이었는데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됨으로부터 개종시켜서 나와 함께 같은 예수님을 믿게 된 자 였었다.
그런데 아내는 나보다 훨씬 빠른 성당에 나가면서 1년만에 영세를 받는데 그날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점점더 날이갈수록 확신을 얻어 내가 보아도 아내처럼 언제나 나도 확신을 가질수 있을까 갈급해 있었다.
그로인해 그렇게 엄청난 장애를 받고 어려운 고난을 당했어도 항상 그 마음속에는 평안함을 엿볼수 있었다.
그 후 음식을 섭취하든지 또한 다른 증세가 병발하든지 남보다 몇배 고통스러운 삶으로 이어져 갔었다.
이제는 병원을 내집처럼 한달이면 반이상을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고 치료를 받아야 했고 오직 일과가 병을 치료하는데에 전부 소용되었다.
나는 이러한 엄청난 장애가 하루 이틀에 끝나거나 낫는다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이제 치로하는 의사도 잘 살면 석달, 조금더 좋다면 9달이나 1년 그러나 3년 5년을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선고했다.
그런데 약 10년간 매년 한번씩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암을 제거하는 수술은 계속 되었다.
한번만 수술하고 끝나도 암치료는 유별나게 고통스러워야 하는데 약물로, 동위원소로 갖가지 치료 방법에 의해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아내는 그 병을 통해서 마음으로 불안해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고 고통받는 아내를 생각할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불편하지 않게 해줄수 있을까 마음을 졸였다.
한번 수술하면 다음번에 또 재발하지 않을까 항상 긴장하고 있는데 어김없이 1년을 못참고 이리저리 전이되어 결국은 9번이라는 기록적인 수술을 거듭하면서 담당하신 의사 선생님 스스로가 이런환자는 처음이라며 수술할때마다 담담한 얼굴로 수술실에 들어오는것을 보았으며 회복되어 병실로 돌아가면 2~3일 이내에 회복되어 식사도 하고 거동을 할수 있는 이런 환자는 처음이다 그런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 의사 선생님이 같은 신앙인으로서 저런 믿음이 흔치 않다고 격찬해 주신때도 있다.
이렇게 기록적인 여러차례의 수술을 하면서도 1차수술후 5년, 2차수술후 10년 드디어 2005년 9월달에 이번에는 갑상선 암만이 아니고 폐로 전이가 되었는데 다발성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이상 폐까지 수술할수가 없으니 이제 인간의 힘으로는 한도에 다 다랐다는 의사의 최종진단을 받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수명이 거의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되어서 낫기위한 치료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아내가 임종때 까지 고통을 덜 받고 지낼수 있나 하는것만이 목적이 되어서 나의 지방에 있는 암 전문병원(개인병원)으로 옮겨 거기에서 9월 6일날 옮긴후로 하나님이 부르시던날 10월 15일 10시 18분 까지 그 병원의 원장님의 치밀한 투약과 정성으로 별로 큰 고통을 받지 않았다.
누구든지 암으로 죽는 사람은 피골이 상접하도록 마르고 먹지 못하고 통증에 시달려서 차마 눈으로 볼수 없는 고통을 치르게 되는것이 의료상식이 없는 일반인에게도 알만한 그런 최후의 고통을 겪는데 아내는 소천하는 시간까지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기력이 없어서 병상에 의지했을 따름이지 섭취하거나 배설하는 것 등 조금도 눈에 보기에 지저분하지 않고 깨끗하게 마지막 시간까지 그렇게 평안하고 환한 얼굴 빛으로 운명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 하면서
아~ 내 아내 임재심 권사는 믿음 그대로 천사의 손에 들려 천국에 입성하는구나 하는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되었다.
계절이 10월 15일인 많큼 따뜻하고 총명하고 좋은날 조상님들의 무덤앞에 육신의 장막을 장사하게 되기까지 자녀들과 친척들 같은 교회의 성도님들 그 장례에 동참한 모든 조문객들까지도 믿음으로 죽은자가 어떻게 죽는것인지를 확인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깨달은 것은 참 믿음은 천국에 입성하는 날까지 하나님이 붙드시고 계획하신대로 시간표에 따라 인도되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중환자로 10년동안을 끄는동안 누우나 일어나나 무슨 동작을 하든지 내 손을 필요로 한 아내와 같이하는 세월 동안에도 기어이 6년이라는 세월을 걸려서 구약성경을 완필해서 신.구약전서를 한권으로 완성, 이것을 아들이 요구한 대로 인쇄해서 자녀들에게 한권씩 말미에는 내 간증문을 붙여서 각각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아내가 소천하기 전에는 나도 믿음이 꽤 있는줄 알고 남들에게 잘 믿으라고 권장하고, 전도하고 제법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왔다고 느꼈는데 이제 나에게 폐암이라는 거의 사형선고를 2006년 3월말에 받았다.
그러면 암은 무슨 암이든지 오늘 발생해서 오늘 아는것이 아니라 적어도 5년, 10년 오랜 세월이 지나야 현대의학으로도 발견할수 있는 것인데 이제 암이라는 진단을 내린것은 적어도 상당한 세월동안 모르고 지내왔음이 분명하다.
내가 아내를 도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려 하셔서 미리 발견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나를 괴롭게 하는 불신이었다.
지난 세월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정말로 나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복받은 사람이라고 내심에 자부하면서 살아왔었는데 내자가 그렇게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소천하는 장면을 떠 올리면서 고통스러운 생각이 목을 죄이며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나는 죽을날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폐암이 아니더라도 시편 90편 10절의 말씀대로 70이 지나고 강건해야 80이라고 말씀 했는데 이제 77세이니 첫번째 말씀을 넘겼고 강건하면 80이라는 날이, 이 시점이 눈앞에 와 있는데 폐암을 진단받고 나니 내 믿음을 스스로 재 점검 할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회고 하고 들추어 봐도 나의 현재의 믿음으로는 아내처럼 그렇게 확실하게 천국에 갈수 있다는 믿음이 서지를 않는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의 믿음이 그동안 나를 얼마나 속였는지 또 내가 얼마나 속고 있었는지 몰랐던 것 남들에게는 믿으라고 전하고 가르치고 그런것이 이제와서 하나하나 들추어 생각하면 내 믿음은 확실치도 않은데 나한테 속고 있었으며 남들에게 좋은일만 했구나 생각하니 참으로 그보다 더 억울한 것이 없고 마지막 날을 생각하니 두려운것 밖에는 남은 것이 없어서 내자의 소천이후 지난 8월 13일 주일날까지 한시도 밤,낮 그 억울하고 깨닫지 못한 두려움이 나의 목을 조르는 고통에 이끌려 1시간 2시간 하루 이틀을 겪으면서 어떻게 하면 때 늦었지만 이제라도 아내가 가졌던 그 믿음을 나도 쟁취할수 있을까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한시도 더 살 가치가 없다는 자책만이 나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현재 내 육신의 상태는 지난 4월 12일 이후로 1주에 한번씩 항암주사를 맞고 의사처방에 의한 복약을 하면서 견디어 가는데 8월 11일 까지 13번의 항암주사를 맞고 우리들 교회를 찾아왔다.
동기는 딸들이 신앙생활을 저희사는 고장에서 성실히 하다가 우리들 교회로 옮겨오면서 애비가 지금 고통받는 원인은 알 바 없으면서도 몸이 불편하시고 어려워 하시지만 너무나 좋은 책이니 보시라고
복있는 사람은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 날마다 살아나는 큐티 (김양재 지음) 위 3권을 보내주어서 몸이 견딜만한 시간이면 펴서 읽기 시작했다.
여러날을 두고 이 저서를 다 보기 전에 내 마음이 이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름대로 유명한 목사님들의 양육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항상 훌륭하신 목사님의 양육을 받는다고 자부했고 신앙관련 서적이라 하면 거의 매일 안본 날이 없을 만큼 많은 저서를 탐독하면서 내 신앙이 다 이분들의 간증이나 설교에 있는 만큼의 믿음이 있는줄 알고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데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도 천국가는 시간에 내가 간직했어야 할 믿음은 되지 못하였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눈물로 나날을 보냈으나 딸이 보내준 이 3권의 글 중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씀과 같이 저자의 신앙과 영력과 육신의 모습까지도 그려볼 수 있는 그 무엇이 나를 설레이게 했다.
건강상태가 겨우 침대에 누웠다가 주방식탁까지 거동하는 것도 숨이 차고 괴롭고 힘드는 형편이며 항암주사를 맞을 때 마다 격는 고통을 이기기 힘든데 벌써 치료를 시작한지 5개월이 다 가는 이 시점에서 어디인지 모르게 저자를 만나면 내 숙제가 해결 받을것 같은 심정으로 변화를 받았다.
자녀들은 조금도 운동할수 없는 입장인줄 다 알고 대전에서 서울까지 온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인데 나에게는 나의 생에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김양재 목사님을 일단 대면해 보고 문제해결에 도움을 받을 욕심이 발동했다.
오기전날 저녁에 직접 한 집에서 나를 공궤하는 자부와 자정부터 그날 익일 한시까지 약 한시간 동안 나의 뜻을 알리고 결행하기로 했다.
나의 소속된 권속들은 모두 내가 전도하게 되어 자부도 믿음있는 사람인데 워낙 나의 건강상태가 염려 되니까 만류하고 싶었으나 내 뜻을 충분히 헤아리고 동감해 주었다.
8월 12일 오후 2시경에 대전 거처에서 출발하여 시내에서 대전역까지, 대전역에서 광명역까지, 광명역에서는 딸이 도착시간에 나와 기다렸다가 함께 보호를 받으며 딸의 거처에 안착했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지금 딸의 거처까지 이렇게 변고 없이 도착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주일날 아침이 딸의 목자 되시는 황혜정 집사님, 양광모 집사님 부부의 사랑과 배려로 그분들의 승용차로 우리들 교회 주일 제 2부 예배에 동참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 이라는 말씀으로 새로운 은혜를 맞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숙제가 이 시간에도 풀리지 않았다.
목사님을 직접 면대하기 위하여 새신자 등록을 하고 예배 후 새신자와의 만남의 시간에 목사님과 가장 가까운 좌석에서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그자리에서 내 문제를 말씀 드렸더니 여기까지 왔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믿음이냐고 칭찬하셨으나 저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더니 목사님께서 황당하신것 같았다.
이어서 몇 분 동참한 새신자들과 대담하시고 마지막에 나를 목양실로 인도해 주셔서 목양실에서 맞 대면하고 내 소원을 다시한번 말씀 드렸더니 그보다 더 큰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정 그러면 지금 이순간에도 안믿어 지세요? 전에 신앙고백을 해 보지 않았냐고 하시면서 그럼 이 자리에서 다시 영접 기도를 드립시다
내가(목사님) 선창 할 테니 한마디 한마디 따라서 복창하여 시인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하시어 로마서 10장 10절 말씀을 받아 복창을 하는중에 순간적으로 이렇게 가까이 있는것을 미련하게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서 확실하게 깨닫게 됨에 내 스스로 놀라고 나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 순간 기운이 동하는것을 느끼고 원주 치악산까지 가서 수련회에 나도 참가하여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욕심으로 관광버스에 오르면서 내 몸이 공중에 떠 있는지 내가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다지 고통받지 않고 가까스로 그 수련회에 동참하니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어디까지 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더 좋은 복을 주셔서 앞에 있는 사람하고도 대화하기도 숨차고 힘드는 터인데 여러 성도들 앞에서 내가 여기까지 병든몸을 이끌고 와서 여러 성도들에게 무엇을 해결받기 위하여 어려운 여행을 하게 된 동기와 지난날의 내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이 성공한줄 알고 마지막 날에 임해서 스스로 속았다는 간증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는 특권까지 주시니 그 이상 더 바랄것이 있으리요.
이제 확신속에서 이시간 여기서 죽으나 몇달 몇년을 더 살고 죽으나 아무 차별이 없다고 믿어지니 수련회에 다녀온 후 내내 흥분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뿐입니다.
그후 자신이 생겨서 수요예배에도 동참해서 장장 오고 가기까지 7시간 30분을 차를 타고 왕래하며 초청강사 강 교수님의 은혜스러운 간증까지 주셔서 더욱 큰 은혜로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오랜 시간을 잘 견디면서 이 몸이 그렇게 피곤한 줄 모르고 돌아 왔으며 또 이번 주일에도 예배에 참예하고 오후에 대전에 돌아가 예약되어 있는 월요일 항암주사에 대비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심을 의지하는 용기가 솟습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하나님을 찾고, 공부하고 삶의 현장에서 신앙인답게 살면 되는줄만 굳게 믿었었지 하나님께서 먼저 잡아주시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이 간단한 원리를 약 24년동안 깨닫지 못하고 한 순간 1분도 채 안걸리는 시간 김양재 목사님의 인도로 믿음을 다시 찾게 됨을 내 소망과 결심으로 되는것이 아님을 다시한번 확인하면서 이 작은 간증을 보시고 듣는 여러분들에게 나처럼 늦게 깨달아 속지 마시고 지금 당장이라도 말씀대로 믿어져서 복된 신앙생활이 되시길 간절히 기원하며 간증할수 있는 기회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영광을 바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