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전 상서/욥24장음향 세팅을 거의 마무리 하고 예주가 피아노 연습을 할 때까지 에스더가 보이지
않으니 슬슬 신경질이 납니다.
부모님 환갑 칠순을 세 번이나 치렀는데 안팎으로 여전히 미숙하고 애로사항이 생깁니다.
장고 끝에 가족들만 참석하는 잔치로 준비한 고희연에 하객들이 72명이 오셔서
홀이 약간 비좁은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반가운 얼굴들 중에 이십년 만에 만나는 친구도 있었고 오늘 처음 보는 사람도
눈에 띄었는데 대부분 제 남 동생의 지인들입니다.
목사님이 도착하자마자 대표 기도를 맡으신 아버지께서 이 정애 여사의 고희를 축하한다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긴장하신 탓인지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는 걸 빼먹어서 사회자가
대신 하는 해프닝이 생겼습니다.
성경 봉독, 에스더의 플루트 연주 후에 장남인 제가 어머님 전 상서를 낭독하였습니다.

당신의 얼굴 / 홍윤숙
어머니
흰 종이에 수묵 풀어
당신의 얼굴
그려보아도
꽃 같은 미소간데 없고
하얗게 바랜 모습
줄줄이 주름진 세월
하늘 같은 희생들
그릴 바 없어
내 손 부끄러이더듬거립니다
.어. 머. 니.
에스더가 사춘기를 겪느라고 삐딱하게 나갈 때 행여 깨질세라 야단도 못치고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다가 서럽게 어머니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더 세월이 가기 전에 더 내가 힘을 잃지 않았을 때
이제라도 껍데기뿐인 부모님을 망각에서 꺼내 보렵니다.
어머니,
우리가 어릴 적에 토방마루에 둘러앉아 모시 잎에 빻은 햅쌀을 물 섞고
육남매가 줄줄이 큰 상에 둘러앉아서
우리 장남, 해석이 해석이 하시던 친할머니랑 밤새도록 송편을 만들었지요.
전라도 담양 식 송편은 딸랑 들깨와 설탕을 섞어서 소(속)를 만들었는데
뭐 그리 맛났는지 아마도 주용이 아빠까진 기억할 것입니다.
7-80년대만 해도 가난한 시절이어서 담양읍내에 살았던 우리 집 남자들은
일년이면 고작해야 서너 번 대중목욕탕에 갔었지요.
그때마다 호랑이 같으신 어머니께서 영락없이 떼 검사를 요구하셨고
매번 아버지와 우리 형젠 된서릴 맞았답니다.
비싼 돈 주고 떼만 불려 왔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해년마다 어머니가 추석빔을 꼭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날인가 온 가족이 추석빔을 차려입고 스냅 사진을 찍으려고 간
평화사진관은 지금도 우리 육남매의 행복한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홍신이네,창희네,영조네,순채네,백미네
적어도 다섯 집 이상이 함께 살았던 그 곳, 담양 읍 지침 리 69번지.
친할머니 장사(葬事)를 끝으로 행방이 묘연한 다리 건너 복순이 아버지,
남학교 앞 문방구 지행이 네,
천변 리 영천상회 안집부터 지침 리 수곤 씨 네 살 때 까지
삯바느질로 우리 육남매를 말간 물 짝짝 나게 키우셨던 어머니께서
친할머니 돌아가시던 날 아버지보다 더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납니다.
시나브로 야속한 세월이 흘러 흘러갔습니다.
어머니는 꿈을 기가 막히게 맞추는 재주가 있었지요.
길조보다는 악몽이 더 용하신 것이 문제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경찰서에 가거나 사고를 치고 도망 중에 있을 땐
영락없이 어머니의 용한 꿈이 비상한 효력을 보여 주곤 하였지요.
꿈이란 과거에 접했던 기억 중에서
집착이나 간절한 바람 같은 속마음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난 지금에서야
꿈 타령은 어머니의 진한 자식 사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아,
이세상의 아들딸들아 이 못난 새끼들아, 새끼들아,
네 새끼만 일촌이냐 이 어머니도 일촌이다
실눈이라도 뜨고 한번이라도 좋으니 눈길을 다오! 하시는
그 가난한 마음을 깨달을 때도 됐는데 그 많은 시간들을 훌쩍 넘겨버린
이 못난 아들이 용서를 빕니다.
어머니,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저희들이 잘 할게요.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만수무강하세요.
2006.8.6.육남매 대표 장남 올림,

에벤에셀의 하나님,
어머니 고희연을 축복 가운데 치룰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우리 육남매가 영원한 구속의 약속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과 당당함을 유지한 욥을 본받아
내 흐트러진 신앙을 일으켜 세우게 하옵소서
사는 것이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주님의 때와 계획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2006.8.8/헤세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