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티기/욥21장매니큐어가 보편화 되지 않았던 시절에 누나들은 제게 종종 봉숭아 물을 들여 주었습니다.
그땐 뭣 모르고 손톱을 덥석 맡겼다가 빨간 손톱 때문에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기
일쑤였는데 왜 그랬는지 중학교 올라가기 전까지는 해마다 세끼 손가락 한 개라도
꼭 봉숭아 물을 들였던 것 같습니다.
봉숭아 물을 들이는 이유도 순전히 개 멋으로 했었는데
오행에서는 적색이 잡귀를 물리친다는 의미가 있었고
속설이긴 하지만 소녀들이 봉숭아 물을 들이고 첫눈이 올 때까지 빨간색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 아닙니까,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욥의 고난이 25일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난히 길고 거세었던 2006 장마에 넉넉히 한달을 견딘 봉숭아처럼
저도 연신 때리는 비바람을 잘 견뎌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제2라운드까지 오면서 하나님께서 까닭모를 고난을 허용하신 이유가
인간의 한계를 처절하게 깨달게 하려는데 있는 것 같고
한편으로는 고난 가운데서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잘 버티는 것이 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넘어지고 자빠질 듯 위태위태해도 끝끝내 버티다가
그 날에 손톱에 아름답게 부활하는 봉숭아처럼 말입니다.
어제 빌딩 숲 담벼락 밑에서 잘도 견딘 봉숭아 이파리를 정성껏 땄습니다.
분홍, 주황 그리고 흰색 꽃잎조차 한 움큼,
이윽고 긴 시간 냉장고 귀퉁이에 짱 박힌 백분을 꺼내 꽃 속에 파묻고
망치로 손 방아를 찌었습니다.
언니가 수련회 가는 날 유치원도 방학을 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위층에 맡겨진 예주가 안쓰러워서 달밤에 체조하고 있는 딸기 아빠를 욕하지 마시라.
조심조심 부드러운 비닐이 딸네미의 흰 손톱에 씌워질 때마다
무척이나 오지고 기쁩니다.
예주야, 느낌이 어때
응, 손톱이 차거 워
아,
자고 나면 감홍 색으로 곱게 물들여질 앙증맞은 열 손가락 때문에
오늘밤 우리는 행복합니다.
내 길을 막고 흑암을 두셨던 주님께서
다시 악인에게 기회를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에는 악한 자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만
절대로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2006.8.1/헤세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