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항변을 들으면서
작성자명 [나화주]
댓글 0
날짜 2006.07.24
욥이 자신의 고난에 대한 각자 다른 견해로 변론하고 공격하는 친구들의 말을 이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하나님을 잘 모르면서 경험론적, 인과 응보적, 철학적인, 전통적인 것으로 단정적 논조로 공격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요, 궤휼이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격언과 방어는 재 같은 속담이고 토성이라고 하면서 욥은 직접 하나님과 변론하겠으니 당하면 자신이 당하니까 제발 잠잠하고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한다.
욥기를 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에 고난당했을 때 생각했던 것들과 현재 우리들교회에 와서 말씀을 보면서 고난에 대한 시각의 격차가 너무나 크고 다르다.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새롭게 해석되어져 누리는 기쁨과 감격이 크다.
목장에서 목원들의 각양각색의 고난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풍성해짐을 느낀다. 진단과 처방이 각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을 분별했다는 기쁨이 있다. 말씀을 통한 진단과 처방이 고통일 때가 더 많아서 하기 싫을 때가 있지만 어쩔수 없이 해야 하는 아픔도 있다.
우리들교회에 와서 큐티를 하면서 저의 오래동안 굳어졌던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이 깨어지기 위해 겪었던 고통은 심했다. 그것이 깨어지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힘들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저의 모습이요, 저의 신앙적 패러다임이었다. 꾸준히 목사님의 설교 말씀과 큐티를 통해 날마다 하나씩 성경적 가치관에 저해되는 요소들을 하나씩, 조금씩 제거하고, 무엇보다 목장에서 목원들을 통해 제 모습을 발견케 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다 보니 제 속에서 끈질기고 굳고 단단한 마음이 깨뜨려지기 시작했다.
처음 우리들교회에 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고, 구원에 대한 애통함보다도 저를 힘들게 하는 요인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랬기 때문에 가정과 교회에서 제가 하는 모든 일들이 욥의 세 친구들처럼 경험적이고 인과응보적이고 지식적이고 논리적이고 단정적이고 전통적인 것들이 많았다. 우리들교회와 목사님이 좋긴 한데 진단과 처방을 척척 내리는 목자들이 왠지 모두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같이 보이고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지금 우리들교회에서 목자인 저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예전의 저와 비슷한 시각으로 저를 판단할 것 같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기왕에 누린 자유를 포기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뭐라 하든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자유를 누리고 싶기도 하다. 그것이 고난에 대한 시각을 넓혀주신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되어진다.
목장에서 목원들의 삶을 보면서 잘 세워지도록 돕고 싶다. 그래서 때로는 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인내하면서 말씀으로 적용을 도와주지만 제 마음을 충분히 알 리가 없을 것 같다. 알아달라고 하고 싶지 않고, 혹 목원들이 서운하게 생각해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굳이 변명하고 싶지 않다.
욥에 대한 세 친구들의 공격과 열변도 이해가 되고, 욥이 친구들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것도 너무나 이해가 되고... 고난에 대한 높고 깊고 크고 넓은 하나님의 뜻을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하나님께서 욥을 들어 사용하셔서 욥이 너무 수고했다는 생각이 든다.
저희 목장의 한 목원이 지난 수요예배 말씀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목자인 제가 자기에게 한 말들이 꼭 엘리바스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끝까지 들으니까 아니더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싶지만 적어도 우리들교회의 목자들이 처방하는 것이 경험적, 인과응보적, 지식적이진 않다고 생각한다. 십자가가 처리된 적용들을 나누며 처방을 하는데 자매가 그것을 아마 잘 모를 것 같았다.
몇달 전에 큰 언니집에서 학원다니도록 보낸 딸 때문에 늘 미안하고 감사해서 전화를 했다. 불교신자인 큰 언니는 3수생을 공부 잘하도록 돕기보다 청년부 수련회에 가게 해서 오히려 공부의 흐름을 방해했다고 엄마가 되어 정말 자녀 교육을 못시킨다고, 그러니까 계속 학교에 떨어진다고 했다. 언니의 말에 어떤 항변도 못하고 미안하다고만 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모르니 그렇지만 문제는 늘 욥의 세 친구 같은 바리새인들이다.
어제 중고등부 예배 때 목사님께서 우리나라는 1970년대 초에 날마다 성경을 읽는 큐티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말씀을 매일 읽으니 자신의 죄를 잘 보기도 하지만 그만큼 남의 죄도 잘 보고 비판이 많다고 했다. 당시 큐티하는 교회의 특징이 지나친 영적 엘리트 의식과 기존 교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건조한 사역으로 이어져 결코 풍성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들교회는 말씀을 보면서 자기 죄를 오픈하고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추니까 풍성함이 있고 계속 부흥된다고 했다.
욥의 세 친구는 자기 죄를 보기보다 친구의 죄를 보고 회개하기를 강요하고 사람을 살리기 보다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정죄감에 시달리게 만드니 욥이 은혜가 되지 않으니 친구들의 말이 불의고 궤휼이고 그들이 거짓말쟁이요 쓸데없는 의원이라 한다.
예전의 저처럼 기존 교회에서 굳어진 바리새적 패러다임으로, 또는 세상적인 판단으로 고난에 대한 공격과 변론이 지속적으로 있겠지만 차라리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변론하고 싶은 욥의 항변처럼 복음의 위력과 말씀의 능력이 그것들을 막고 책망하여 잠잠케 할 줄로 믿는다. 욥의 고난을 통해 귀로만 듣던 저 역시 눈으로 직접 말씀을 보고 깨닫는 영적 풍성함을 더욱 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