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작성자명 [이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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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7.17
욥은 죄 때문에 받는 고통이라는 친구 엘리바스의 말에 죄악 때문이 아니라는 변론을 펼친다.
그런 후에 자기 자신의 인생이 허무함을 탄식한다.
또한 한편으론 나 같은 인생을 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고 시험을 하시나 원망한다.
욥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엄청난 고난의 시간을 보낸 것을 본다.
그런데 나 같이 믿음도 형편없는 사람에게 욥과 같은 시련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요즈음 나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다. 사실은 진짜 내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그 어떤 사건이 와도 괜찮다고 했고
어떤 때는 나에게는 왜 시련을 주지 않아 실력(?)을 보일 기회를 주시지 않냐고 교만 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던 큐티에서 승리했던 나는
나와의 진짜 전투에서는 매번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 나의 형편없는 진짜 실력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똑같은 교만의 말을 내뱉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길 ‘어쩔 수 없이 주셔야 한다면 받겠나이다.’ 의 기도를 하게 되었다.
나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혼자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나를 핍박한 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서로 너무도 다른 가치관과 언어 자체가 나에게 고통이였다.
그래서 어린 청소년기에 나는 자살을 생각하며 믿음을 나의 유언으로 남길까 하는
잘못된 방법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왜 나를 먼저 택한 백성 삼으셔서 힘들게 하는가 라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아직까지 믿지 않는 가족들 가운데 남동생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동생은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가족들에게 동생의 존재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그야말로 무관심이고 연락이 오더라도 서로 피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다.
그러나 믿는 누나라고 나에게 연락을 해 오곤 하는데 결국은 돈을 해 달라는 요구들이다.
동생의 끊임없는 부탁을 분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더 힘든 것은 믿는 누나라는 말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할 말과 행동들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되는 내 자신의 연약함이다.
구원이 먼저라 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동생을 구원의 대상으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동생의 믿음으로 가족구원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만큼 당연한 실망감도 더 크게 올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에게도 임하고 나에게도 임한다.
그런데 나는 나에게 임하신 하나님은 뒤로하고 동생을 통해 편하게 전도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욥의 고통은 뒤로 하고 욥을 정죄 했던 엘리바스처럼
나는 동생이 혼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말에 화를 내며
결국 동생이 마음의 연약 때문에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만 했던 것이다.
욥은 사람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보다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아뢰었다.
욥을 보면서 남동생의 성화 되어져야 할 삶은 결국 내가 먼저 성화 되어져야 할 삶인 것과
먼저 믿은 내게 책임을 물으실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형편없는 나를 과녁 삼으셔서 스스로 힘드실 하나님을 생각하니 너무 죄송스럽다.
원망의 마음으로 나를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동생을 정죄 했던 엘리바스였다.
혼자 어쩔 수 없는 동생에게 나도 못하는 것을 고하고 함께 하나님께 의뢰하고
그래서 공동체에 속해 함께 갈 것을 말해야겠다.
욥처럼 힘든 고통 가운데 사람에게 고하지 말고 하나님께 고하고 내게 주실 말씀을 들어야겠다. 집안에서 이 고통 가운데 내가 하나님만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이는 것이
하찮은 나를 과녁 삼아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