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내가 같은 교사야`
작성자명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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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7.12
큰애 담임과 내가 같은 직업이라는 걸 정말정말 탄식하며 고통스러웠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큰애는 잠꼬대로 계속`내가 안했어. 안했어~~~` 며칠 계속되는 새벽 1시경 아이의 울음섞인 잠꼬대에, 전 그해 담임샘을 저승보내고 싶었답니다.
아이에 관한 모든 정보를 분명히 가정통신문에 적어서 보냈는데, 찾아간 그 날(4월말쯤)까지도 애 담임샘은 우리 아이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모르시는 듯 날 2시간동안 야단만 치셨었다.
`아이의 수준이 왜 이모양이냐! 스켓치북을 가리키며 이게 그림이냐! 글씨체는 왜 그러냐! 엄마 맞냐! 교사 맞냐! etc...`
2시간동안 대답 한번 못했었다. 나보다 선배님이셨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으셨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이 춤을 추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교사들의 `break time`이 규칙적으로 계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2교시 후 교사들이 모여 차마시며 정보교환하는 그 휴식문화. 일명`coffee time`이 다른 학교에선 거의 사라진 풍경인데 그 시간이 지속되고 있었던 학년이었던지라...
그 시간만 되면, 학기초 첫날에 전학간 우리애는 교실바닥에 뉘어졌었고, 아이들의 축구공이 되었었고... 멍이 심상ㅎ치 않아 눈치는 챘었고, 그 현장을 목격한 작은애- 같은 층 사용 -가 일러준 것도 있고...
엄마로서
야단맞던 그 날(근무학교 휴업날) 담임샘께 상담하러 갔었었다.
그 후 악화되었었다.
사용안한 급식 수저...
`반찬이 맛없다나???`
아니였다.
별의별 누명이 아이에게 뒤집어 씌워지고, 담임샘은 우리애만 추궁했고...
파란멍은 새카맣게 되고.... 그 부위도 점점 늘어나고...
어느날,
애가
`엄마 나 학교 안가면 안돼?`
애들이 때린다는 소리보다 `선생님이 이상해...`
애들 아빠가 가서 알아보니, 서너명은 매일, 15명~16명의 아이들이 우리애를 때렸었고, 앞으론 그런일이 안 일어나도록 주의 하겠노라고.....
했다며 담임샘이 알아서 하지 않느냐고, 해결된줄 알고...
애를 다시 근무지로, 전학시켰었다. 마침 후덕하신 부장님반 차례라서 애는 그반으로 들어갔고, 1,2학년을 같이 보냈던 아이들이라 그 해를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끝에 우리집 큰애는 한학년이 낮춰졌고...
하늘이 열린 것 같은 오늘.
이 빗속에 중1 극기훈련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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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 후에 교사인 난. 반에서 아이들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었다.
장난은 OK! 말썽은 NO!
친구도 즐거운 장난은 허락하지만, 나만 즐거운 말썽은 절대 불가!
우리반에선 절대 당하고, 괴로운 아이가 있어선 안된다고...
반 아이들 성적은 저절로 올라갔었고...
비 공식적으로 `등교 거부`하는 다른반 아이를 한학기 동안 돌봐 주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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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뉴질랜드(9개월)와 캐나다 유학(10개월)을 했었다. 작년 캐나다에서 돌아와서 중학교 입학을 거절당했고, 초등6학년으로 들어가 초등학교를 정식으로 무사히 졸업했고 지금은 중학교 1학년.
우리 아이를 거절해 주신 첫 중학교 교감선생님이 너무너무 감사했었다.
아이의 객관적 능력을 잘 알고 있기에 초등 6학년 입학을 권유하는 엄마 의견과는 달리, 본인과 아빠는 또래 아이들과의 학업을 고집했었다. 초등 3학년 때의 사건이 있었기에 엄마로선 도저히 같은 학년에 넣을 수가 없었는데, 본인 의지와 아빠의 의견이 맞물려 중학교에 입학하러 갔었었다.
교감선생님께서 아이와 아빠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시는데, 내 생각과 동일한 말씀을 해 주셨었고... 정말 감사했다. 아이와 아빠 의견이 결실을 못맺었으니,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었고, 아주 알차게 잘보내고 2006년 2월, 집 근처 초등학교를 졸업했었다.
아이가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예전의 악몽들이 되살아났고 맘이 다스려지지 않아 우리들교회를 갔었고, 간 첫날 펑펑 울었고.... 등록을 했었습니다.
처방전에 의해 100% 해결될 것 같아 목사님댁도 갔었습니다. 정말 잘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런 현명함이 큰애 태어나고 `육아휴직`을 못했을땐 전혀 발휘를 못했고...
왜?
휴직을 못하게 하셨으니 `애는 키워 주시겠지....` 주변 동료들의 아이가 양가 부모님에 의해 많이 양육이 되어지기에 다른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답니다.
제 생각에 제가 무덤을 파고 있었던 시절이었답니다. `내카드 내통장이 사용되니 남편은 고스란히 잘 모으고 있겠지...`
예수님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기에, 분별력이 없었죠.
남편은 7남매중 셋째 아들입니다.
결혼은 했어도 혼자 사시는 시골 맏형님은 냉동창고 운영하시며 년간 1억원 가량의 순수익을 올리신다고 합니다. 이혼하신거죠. 시댁 `형제들에 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마`라는 결혼 초 신랑의 말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도 몰랐었고...
바로 손위 둘째형님네 가족은 지금 어디에 사시는 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아이가 셋 있었고, 제가 결혼하고 몇년간은 시댁에서 보았기에 얼굴은 안답니다.
가출한 언니 딸을 찾고 언니를 교회로 인도하기까지의 과정중에 유난히 민감한 남편 반응의 원인을 전 알죠.
시댁과는 전혀 다른 자매애에 질투하는 거로 치부해 버리고 더 용감하게 행동하며 남편을
화나게도 했답니다. 남편은 언니에게 전화하는 도중 TV리모콘을 던지기도 했고...
언니도 교회온 지 3개월만에 등록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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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큰애를 통해 우리집 경제 사정은 오히려 나아졌답니다.
아빠 수입 대부분이 시어머니에게로 갔었기에, 제 월급으로 생활했었고... - 결 혼 초 몇 년간 그 사실 몰랐음 - 큰애 키우기 위해 `육아휴직`을 하려는데, 반대하는 이유도 모르고... 정말 맹하고 둔했던 시절이었답니다. 비어있었던 서울친정집에서 신혼을 시작했기에 애들 아빠가 신혼살림 차리려고 전세를 얻은 것도 아닌데, 애들 아빠 수입은 여전히 시댁으로 갔었고....
큰애 육아휴직 못했던 것, 큰애 다른 사람 손에 돌려 키워진 것, 내 몸 아픈 것 모든 것을 원망하며
어느날,
`그냥 혼자 살고 싶다`고 제 맘을 솔직하게 털어 놨더랬습니다.
그런데
.
.
.
.
.
`그동안 살아줘서 고마웠어.`
남편의 그 한마디에 모든 원망, 절망 사라졌고... 우리 부분 밤새 펑펑 울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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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큰애를 유학보내고자 맘 먹었었던 그 해부터, 남편의 수입은 우리집 경제에 도움을 주고...
지금은 시어머니 용돈이외엔 남편의 봉급이 시댁으로 가진 않는답니다.
지금은 맏형님이 시어머님을 도와주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맏형님은 시댁에 오시지는 않고...
무슨 사연들이 그리 절절한지
시댁에 출입하는 고정멤버는 저희 가족뿐이랍니다. 다행히 가까이 사는 막내 시동생이 결혼하여 자주 가주고...
살아있는 사람의 생일은 무시되고, 집안의 제사에 헌신하시는 시어머님. 남편.
얼마전에 그 제사 우리 큰애가 이어가야 할 것 갔다는 멘트를 날리시고...
식혜 첫 맛보기를 남편이 아닌 큰애가 하고...
우선 병풍부터 가져가라는 시어머님의 말씀에 `옮기는 비용`이면 한개 구입 할 수 있겠다 싶어 거절했고, 그런데...
저는 병풍부터 가져가라는 소리가 제사 가져가라는 말씀인줄 몰랐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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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애는 정말 저에게 보석입니다.
큰애가 작년 캐나다에서 돌아온 후 한국에서 다시 학교를 다닐때 저의 노심초사는 여전했었고...
맘 불안해서 가본 교회와 목장에 찰싹 달라 붙어 진정한 평강을 누리고 있고...
지금은
제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넘 많이 보인답니다.
큰애 현재 담임샘의 포용력과 여유가 `직업정신`으로만 버텼던 저와는 다른 차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큰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