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아직도
작성자명 [서선희]
댓글 0
날짜 2006.06.12
창세기가 시작될 때 말씀 안에 숨겨져 있는 도(道)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도(道)란 길이고 길은 인간이 마땅히 가야할 방향입니다.
상대주의를 따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道)는 절대적이 아니라 그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문화적 상대주의는 열심히 받아들였던 제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면서 ‘도(道)는 있다’로 바뀌었는데,
그 마땅한 도(道)를 정리하여 내 갈 길을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도의 도, 인간 본성에 숨어있는 도, 자연의 도, 노동의 도, 남자와 여자의 도, ....
이런 것들을 정리하여 그동안 산만하게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내 자신에게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창세기 묵상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절대 믿음/절대 신뢰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이름이 창세기라서 역사의 생성과 흐름에 대하여 말할 것 같지만
실상 따라가보니 창세기는 (히브리서처럼) 믿음의 장이더라구요.
그래서 처음의 제 바램과는 달리 여기 저기 널려져 있던 신뢰하지 못함을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여 가며 그것들을 버려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을 다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이 시온의 대로로 보여져
갈라진 홍해를 건너듯 창세기를 건넜습니다.
결국은 이삭을 드리는 정도까지 내가 올라서기를 원하시구나 감격도 하며
눈물도 흘렸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은 무기력합니다.
안개에 갇혀 발이 자꾸 밑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지난 금요일, 일의 앞뒤를 야무지게 맺고 끊기 잘한 후배 동료를 칭찬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의 어떤 행동에서 허를 찔린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나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치고 나갔습니다.
(나이들어 가며 이런 일이 심심찮게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심때문이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것 또는 명예욕은 그리 오랫동안 씨름해왔는데도
여전히, 아직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제 토요일은 유학간 친구의 아이들 둘이 여기 한국에 있을 때보다 유능한 모습으로
여름방학을 보내려 온 모습을 보고 시험받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제 안목으로 계획하고 시행하고픈 욕심이 기어나옵니다.
육적 복보다 영적 복이 먼저라고 그렇게 확실하게 믿고 있는데도,
여전히, 아직도 니므롯을 내 눈으로 보게 되면 육적 복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지 못합니다.
구역장으로 일하면서 제 구역만 제가 강권하여 큐티를 해오고 있는데
어제 주일, 구역원 대다수에게 ‘중요한 일’이 생겨서 더 이상 큐티 모임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말씀을 붙잡을려고 하고, 내 죄를 보고자 하는 제 모습이 그분들께
너무 심각하고 무겁게 신앙생활하려는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에 무기력감을 느낍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말씀과 씨름해왔건만
여전히, 아직도 제 언행에 생명이 스며나오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니까요.
이렇게 저렇게 적용을 해봐도 여전히 말없이 자기만의 성에 앉아있는 남편때문에도
무기력합니다. 남편의 변하지 않음보다는 죽는 적용을 한다면서도
온전히 죽지 못하는 내 모습 때문에 더 무기력해 집니다.
도(道)를 몰랐을 때는 깨닫는 기쁨이 컸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밭을 사기 위해 단숨에 집으로 달려가는
기쁨이 가슴을 메웠습니다.
그리고 그 보화를 조금씩 사는 즐거움도 얼마나 큰 보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때로 보화만 모을 뿐, 그 보화를 상자에만 담아놓고 사용하지 못하는 좌절감으로
무기력해지곤 합니다.
아브라함을 쫓아 순전한 믿음을 향해 달려왔는데,
끈질긴 명예욕, 육적 복을 기웃거리는 것, 시늉만 내는 죽어짐...
이런 것들로 순전한 믿음은 여전히 머리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오늘 아침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나눔을 통해 소리 지르집니다.
거기 누구없소? 나를 야단좀 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