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녀 딸을/창22:1~24 제게는 금쪽같은 두 딸이 있는데 지금이라도 마지막 시도를 한다면 분명히 아들을
낳을 수 있지만 저는 딸들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아내의 태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딸기 아빠로서 보부도 당당히 바지 바람을 일으킬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잘난 딸 때문이라는 것을 동네 사람들과
담임선생님까지는 다 압니다.
저는 십년 째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울 공주를 예고에 보내려고 합니다.
어제는 분당에 있는 k 예고 미술 실기대회에 갔다가
뙤약볕에 줄 서 있는 학생들 속에서 반짝 반작 빛나는 울 공주를 보았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어디에 내 놓아도 언제나 어디서나 돋보입니다.
저녁에 일찍 일찍만 들어온다면 난 우리 공주에게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막내 예주(7세)는 괄호를 닫았다가 낳은 딸로 처음엔 언니에 가려서
몰랐었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미모와 지성을 갖춰가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피아노는 이제 체르니(Czerny)를 치고
기탄수학도 했다하면 앉은 자리에서 한권을 다 끝내는 실력파인데다가
저녁까지 나가서 해결하고 들어온다니 이런 효녀가 또 어디 있습니까,
우리들의 비웃음을 웃음(이삭)으로 바꾸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는데 이번엔 자식을 번제로 바치라는 겁니다.
휴~ 제게 직접화법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니 천만다행 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이유는 믿음의 시련 과 선악을 분변할 수 있는
지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라고 하니 남의 말처럼 들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까지는 약 70km정도인데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하여
3일 만에 도리아 산에 도착했습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끼는 자식이었고
또 이삭이 죽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이 무산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미 죽은 몸에서 이삭을 생산케 하였다면 죽은 이삭인들 살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대단합니다, 역시 믿음의 조상답습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출애굽, 유월절, 홍해, 광야생활을 겪으면서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싹트고 점차 자라서 구원에 이르는 온전한 수준까지
도달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왜, 아들까지 죽여야 하는지 그 뜻은 도대체가 모르겠습니다.
누구 아는 사람 있나요?
수양을 보내심으로 아들을 대신할 번제물을 준비하신 하나님 찬양을 받으소서.
자기희생이 없는 사랑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또 배웁니다.
믿음의 실천 장에 관객이 없을 때에도 ‘여호와이레’를 믿고
내 목숨과도 같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2006.6.5/헤세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