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유감
작성자명 [서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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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5.15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창 9 : 25)
오늘 노아의 행적, 이해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생깁니다.
고단한 노동과 풍성한 수확 끝에 몇 잔 마시고 잠들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의인이었던 그가 술에 취한 모습은 그런대로 이해가됩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은 그가 내린 저주입니다.
술 마시고 취한 채로 벌거벗은 모습을 자식들에게 드러낸 그가
어떻게 그렇게 무섭게 판단자로 변하여 저주를 내릴 수 있는지...
(노아는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축복과 저주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도
명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은 잘 이해가 되는데 오히려 이 작은 부분에서 걸리게 됩니다.
창세기를 시작할 때 기대가 됐었습니다.
역사의 시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믿음의 선조들의 행적을 보여주셔서
인간의 어떠함과 그것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다시 한 번 확실히 할 수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시작한지 보름이 넘어가는데도 기대했던 만큼의
채워짐이 없습니다.
오늘 식의 노아의 저주 사건과 같이 자꾸 작은 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뱀은 분명 인간과는 다른 종으로 지으셨을 텐데 뱀이 어떻게 언어를 사용할 있지?
아담과 하와는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후에야 동침을 하지?
네피림은 어디서 났을까? 가인의 자손들이 결혼한 사람들은 누구지? 등등...
하나님과의 인격적 조우 후에 제 신앙의 전진에 방해가 되었던 걸림돌이 둘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돕는 배필”로서 여성을 정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성장한 시기는 엄격한 군사 독재와 더불어 제한과 차별의 가부장제가 강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성 평등은 제게는 구원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성경에 있는 그대로 믿기 시작하였는데,
여자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든지 교회에서는 여자는 머리 수건을 써야 한다든 지를
말하고 있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하는
의문이 자꾸 생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다루심으로 인해 우여곡절 끝에 여자의 정체성을 남자의 돕는 배필로
보는 것에 동의하게 되어 이 부분은 상당 부분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로 지어졌다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격렬한 씨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요즈음의 여자들이 직업을 갖는 것은 사회변화 때문에
발생하는 구조적 성격이 강합니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글로벌화로 국가간 경쟁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은 사회적 대세가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가정 밖에서도 여성의 역할을 남자의 돕는 배필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제 신앙의 진전에 걸림돌이 되었던 또 다른 하나는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티라노 사우루스와 같은 공룡의 화석이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몇 만 년이라고 증거 해주는 공룡의 화석은 엄연한 객관적 증거였고
성경은 그것과 동떨어져 보여 성경을 그대로 믿는 것이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런 비슷한 기능을 앞에서 말한 창세기의 군데군데에서도 보았고
그런 점은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서 저의 믿음의 행전에서 김을 뺍니다.
그렇다고 “과학적 증거”에 일치되어 보이지 않는 이런 부분들이 제 믿음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는 출애굽의 경험, 몇 번의 환도뼈가 부러진 사건, 말씀이 인도하신 사건 등의
체험이 너무 생생하니까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다시 혼돈 속으로 들어가기는 싫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 혼돈이 갈라지게 하여 주소서 하고요.
그러면서 창세기를 히브리서와 같이 읽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우리의 과학적 사고라는 것도 기껏해야 현재의 오늘에만 이르는 것들이라는 점을
환기합니다. 많은 것들이 밝혀진 것 같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밝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과학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제한적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몇 년 전의 식품영양학은 고단백 위주의 식사가 건강에 최고라고 했었는데,
지금의 식품영양학은 채식 위주의 식사가 건강에 최고라고 합니다.--과학적 지식도
바뀔 수 있으며, 그래서 과학이라는 것도 최종적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합니다.
과학의 지식도 진전 중에 있으며 영적 계시 또한 진전 중에 있어서
현재의 우리 시점에서 안 보일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역사가 그리고 계시가 진전되면서
보다 많이 드러나게 될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상으로 믿는 것은 옳다고 나를 이해시킵니다.
더하여 육체에 갇힌 우리가 영적 세계를 다 알 수 없다는 점도 기억하여 냅니다.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다 모른다”가 정답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가인의 후손이 결혼한 사람들이 이런 저런 사람이었다고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아직은 “잘 모른다”라고 말하는 쪽이 더 마음에 듭니다.
창세기의 하루가 과연 지금의 하루와 같은 개념이냐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는 것보다 문자 그대로 하루라고 믿으며,
지금의 과학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마음에 듭니다.
공룡이 성경의 어느 부분에 나와있다고 이것 저것 기워 맞추는 것보단
그 부분에 대해선 성경이 확실하게 다루고 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마음에 듭니다.
성경이 어떤 부분은 건너뛰거나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 것은
성경의 목적이 구속사를 보이는 것에 있기 때문에 생략과 약식 설명은 당연한 것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을 실상으로 믿을 수 있지 않겠냐고 스스로에게 설명합니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처음의 기대처럼 인간의 삶의 모습에 대한 더 밝은 이해를 얻기보다는
제가 여전히
주의 긍휼함과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나아갈 수 없는, 부족한 존재임을 더 많이 봅니다.